부경(桴京)으로 남아있는 고구려

 

지금부터 15년 전인 1994년 8월의 어느날, 나는 만주 벌판에 있었다. 만주는 내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땅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요, 고구려의 심장부였던 땅.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김좌진, 홍범도 등 수많은 우리의 독립 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바로 그 땅. 고향에서 늘 보아오던 산과 강이 있어 전혀 낯설지 않은 땅이었다.

 

나는 고구려의 왕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심양까지 비행기로 가서 심양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통화에서 내렸다. 통화에서 다시 자동차로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 있었던 집안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통화에서 집안까지 120㎞. 포장도로라면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거리를 3시간째 달리고 있었지만 아직 절반도 못 왔다고 했다. 요철이 심한 비포장도로인데다 우리가 탄 차는 20년도 더 된 러시아제 지프였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멈춰 섰다.

 

마침 몸도 뻐근하고 출출했기에 쉬기도 하고 요기도 할 겸 가까이 있는 민가를 찾아 들어갔다.

 

집 대문을 들어서는데 이상한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그 구조물은 우리의 원두막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땅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어른 키 정도 높이에서 가로로 나무를 대어 바닥을 만들고 벽체와 지붕을 얹은 원두막 형태의 구조물. 그것은 바로 기록에 전하는 고구려의 부경(?京)이었다.

 

고구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중국의 진수(陳壽·233-297)가 쓴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인들은)큰 창고는 없지만,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다. 그것을 부경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고구려의 부경을 천년도 더 지난 지금, 조선족도 아닌 한족(漢族)이 만들어 놓았을까?

 

식사 후 차를 고치고 다시 출발했다. 지나치는 마을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집집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부경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확인한 것은 부경은 고구려의 영토 내에만 있다는 사실이었다.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구려의 영토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부경의 모습은 중국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문화의 영속성에 대한 최초의 충격이었다. 1천500여년 전의 고구려가 이렇게 부경으로 살아있다니.

 

나는 심양 근방의 시골 마을로 들어가서 한 중국인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다. “할머니, 혹시 고구려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그 할머니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여기는 우리 땅이 아니야. 바로 고구려 땅이야. 우리가 와서 잠시 빌려서 살고 있을 따름이야. 언젠가 다시 고구려가 돌아오게 될 거야”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주 지역의 많은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중국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반응이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말하며 무시하려고 했지만 고구려에 대한 그들의 반응 속에서 알 수 없는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독 한국 사람들에게만은 고구려 유적에 대한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려고 하는 중국인들. 고구려 고주몽이 처음 도읍을 한 환인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왜 그럴까 생각했던 내 의문은 한 중국인 할머니의 대답을 통해 쉽게 풀릴 수 있었다. 고구려는 부경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 나는 전혀 몰랐다. 이미 동북공정 사업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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