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폭력독재’

선거 구호가 ‘무산계급에서 나온 사람, 무산 대중이 밀어주자’ 같으면 이건 좌파다. 내가 그러했다. 서울시의원 서대문 제5선거구였다. 자하문고개, 안산고개 넘어 홍제동·홍은동·홍지동 등 일원이다. 그때가 장면정권 망정이어서 탈이 없었지, 안 그랬으면 당국에 끌려가 치도곤을 맞았을 것이다.

제대 직후다. 채석장에서 잡부노릇을 하는데 거들먹거리던 채석장 주인이 출마하여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만 스물다섯, 젊은 시절의 객기였다. 물론 그는 당선되고 나는 떨어졌다. 난 원래가 좌파란 걸 말하기 위해 새삼스런 얘길 꺼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우파로 분류된다. 시인한다. 하지만 지금의 좌파가 과격한 좌편향 과다 일변도인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우파가 된 것이지, 좌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배와 성장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더 두느냐가 좌우의 개념이다. 분배는 사회복지 개선, 성장은 자본시장 육성으로 나타난다.

십여년 전이다. 복지국가의 천국인 스웨덴에서 좌파정권이 총선에서 몰락해 퇴진했다. 장애인이 이사갈 집을 신고하면 자치단체가 장애에 맞춰 집 구조를 고쳐주었을 정도다. 국가에서 주는 실업급여가 상당해 웬만해선 취직할 생각을 안 했다. 사회복지 제도를 이토록 발달시킨 좌파정권이 정작 국민의 선택에서 외면됐다. 사회복지 발달에 따른 국민의 세부담이 너무 과중했기 때문인 것이다.

성장과 분배, 분배와 성장은 이토록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국민사회의 삶의 질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킨다. 국민이 분배 위주의 좌파정권을 선택했으면, 나중엔 성장 중심의 우파정권을 지지하는 등 번갈아가는 반복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건국한지가 예순한 해다. 이 가운데 좌파가 집권한 지난 십년은 이도 국운이다. 우파의 오만을 일깨우기도 했다. 이런 좌파가 정권을 잃었으면 다음 기회에 집권을 노리는 것이 순리다. 정부 시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다. 국회 의사당을 때려 부수고, 길거리 불법 시위를 일삼고, 민중 선동을 부채질해가며, 이명박 정부더러 ‘독재정권이니까 물러가라’고 목소릴 높인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트집잡아 발목을 비튼다. 정부 시책을 비판하는 것과 트집 잡는 것은 다르다. 국회는 여야 대화가 안 되면 표결로 처리하는 것이 종다수 의결의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깨고 있는 것이 작금의 좌파 진영이다. 원칙 파괴를 일삼는 변칙 지상주의는 민주사회의 폭력이다.

국민과의 소통 부재를 말한다. 어느 나라, 어느 정부든 모든 국민 계층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정책은 집중과 선택이기 때문이다. 지난 십년의 좌파정권 역시 우파와의 소통은 완전히 단절됐었다. 지금의 우파정권 더러 소통이 안 된다고 우기는 좌파 진영은 지난 집권기간동안 국민과의 소통 부재가 더 했다. 국민과의 소통 문젠 다음 대선에서 국민이 판단할 일이지, 좌파 세력이 폭력 수단으로 구실 삼을 일은 못된다.

대북 관계는 한국적 좌파의 특성이다. 좌파는 진보주의다. 그러나 좌파 중 일부를 뺀 국내 좌파엔 순수한 좌파, 즉 진보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에 심취하는 성향이 짙다. 북녘 동포와 등지고 살려는 사람은 없다. 평양정권과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종북주의 좌파들은 우파의 상호주의를 민족 분열 세력으로 몬다. 전쟁광으로 매도한다. 우파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헐뜯으면서도, 북측의 권력 세습이나, 인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여태껏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것이 종북주의 좌파의 비굴한 생태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 그도 민주주의의 본질인 다원화 사회의 하나로 보고자 한다. 하지만 폭력은 안 된다. 국회 개회나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폭력, 경찰과의 전쟁을 일삼는 불법 시위의 폭력, 사회를 불안케 하는 ‘떼법’의 폭력 등은 더 이상은 안 된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좌파의 ‘폭력독재’로 시일을 마냥 헛되게 보내어 민생을 더 어렵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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