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이 재임중 비리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다면 빅뉴스 중에도 빅뉴스다. 조사 내용의 하나 하나가 다 국민적 관심사다. 이런 경우, 검찰의 수사 상황 브리핑은 국민의 알권리에 부응하는 것으로 이도 직무 관련이다.
검찰의 수사 브리핑을 피의사실 공표죄로 걸어 문제삼는 고발이 있었으나, 전직 대통령은 사생활 보호가 우선시되는 보통 시민이 아니다. 보통 시민도 예컨대 사회공익을 현저히 해친 피의자는 피의사실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하물며 전직 대통령의 혐의는 마땅히 개인의 명예보다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이다.
피의사실 공표죄만이 아니라, 확정판결 이전의 무죄추정주의가 또 있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이 없으면 무죄로 보는 취지로 형사소송법상의 거증책임을 검찰에 귀속시키는 것이지, 피의자의 혐의사실이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무조건 언론에 브리핑 해선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한 검찰의 수사 브리핑이 정당한 것은 법률상의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지 않을 사람들이 꼬투리 잡는 것이 슬프다.
또 이런 말들을 하는 이들이 있다. “자살로 찬란하게 부활한 그는 역시 승부사답다”는 것이다.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분에게 과연 자살할 권리가 있느냐는 의문은 갖는다. 법정에서 끝까지 시비를 가려 유·무죄의 결과를 보이는 것이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도리라고 믿는 것이다. 만약 유죄가 확정되면 형의 선고와 함께 600만달러와 3억원의 추징금이 병과될 것이다. 반대로 무죄가 나면 중수부장 등이 탄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미완의 사안으로 끝났다.
공전의 추모 인파는 그들의 선택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그만한 것 가지고 너무 심했다”고들 말한다. 추모는 추모객들의 맘이지만, 그런 말을 듣는 건 정말 슬프다. 대통령의 지위는 공무원보다 더 엄정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말단 9급 공무원도 뇌물을 받으면 형을 산다. 더 엄정해야 할 대통령의 600만달러 뇌물 혐의를 ‘그만한 것’으로 치부하는 추종적 관용은 객관성 없는 가치관의 혼돈이다.
호치민이 베트남 인민들의 추앙을 받는 것은 생전의 생애가 진짜 완전한 서민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호치민 박물관에는 그가 항일전쟁을 벌인뒤, 북베트남 공산정권 수령을 지내면서도 서민층과 똑같이 먹고 자며 생활했던 나무침상 등 가재도구가 전시돼 있다. 드골의 낙향은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것이었으나, 생가에서 조용히 지내며 동네 꼬마들의 할아버지 노릇을 하다가 유언으로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국민들은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이룬 대통령’으로 그를 숭모한다.
일부의 신문방송 등 언론보도 또한 서글프다. 예를들어 생전에는 “고해성사하라”며 비판적이던 언론이 사후엔 조문 인파의 위세에 밀려 ‘정치적 타살’이라는 등 영합주의로 돌변한 카멜레온식 반응은 언론의 자질을 의심케 했다. 가치관의 혼돈을 분별치 못하는 이런 언론이 과연 사회의 공기인가를 생각케 한다. 타계에 대한 조위 표시가 논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구분되는 것으로 별개인 게 언론의 소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점은 두드러진 개성이다. 투박한 언어 구사, 충격 요법 등 격식을 깬 그의 언행은 신선하게 들릴 수가 있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내용은 또한 국민들을 피로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이승을 떠났으므로 해서 그에게 느꼈던 피로감은 잊혀지고 신선감만 남아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하여 대통령 재임 중의 공과를 새삼 여기서 말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봉하궁을 안짓고 생가를 중수한 옛집에서 박연차 게이트 없이 향리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면 정말 사랑받는 서민 대통령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슬프다.
그 분의 불행스런 자살을 여권은 ‘국민화합’, 야권은 ‘국면전환’으로 삼지만 다 부질없다. 화합도 전환도 될 수가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략화 삼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멀리보아서는 없을 뿐만이 아니라, 정략화 삼는 것 부터가 생각해보면 산자의 이기심이다.
국민장으로 떠나 보냈으면 산자의 이기심으로 그 분을 더 제단에 올려 시끄럽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편히 쉴 수가 없다. 고발 등으로 시비의 와중으로 자꾸 몰아 넣는 것이 고인을 위한다 할 수는 없다. ‘노통’에 대한 이런 칼럼도 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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