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자들의 몫

5월23일, 그 주말 이후로 겨우 며칠이 지났지만 마치 깊고 넓은 강을 건너 온 것처럼 그 날의 일이 아득하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연이어 일어났다. 어느새 달이 바뀌어 6월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 열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또 한 굽이를 힘겹게 돌아 나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자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여겨 보아야 할 변화의 징후들은 노 전대통령의 서거를 역사로 만들어 낸 그 수많은 조문객들과 자원봉사자들이며, 이들이 표현해 낸 마음 속의 ‘비통’함이다. 물론 양자는 따로 떼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필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노무현이 이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노무현을 낳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 2002년에도 그랬고, 2009년에도 역시 그러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서너 시간씩 줄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만들었던 이 국민들의 성숙한 ‘비통’이 핵심이요, 근원이다.

이 짧은 열흘 사이에 다 죽은 것처럼 보였던 민주당의 지지율이 난공불락과도 같아 보였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앞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본질적인 변화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스스로가 내쳤던 노무현의 죽음을 팔아 얻어진 이 결과를 두고 또 다시 길거리에서 지갑 주은 사람처럼 뒤돌아 웃음을 삼키는 민주당 의원들이 있다면 (탄핵 정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머지않아 더욱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노무현을 지우고 가리려고 안달하는 정부 여당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광장을 전경 버스로 서둘러 막고,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분향소를 철거하고, 영결식장에 고인의 상징색인 노란색 물건의 반입을 차단하고, 만장의 깃대를 PVC 파이프로 교체하고, 단 한 번도 마음에 둔 적이 없는 고인의 뜻을 핑계 삼아 뒤늦은 국민 화합과 용서를 떠들어도, 그들의 대응은 대략 헛다리일 뿐이다. 잘못 짚었다. 노무현은 결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이러한 인식 능력의 한계 역시 곧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아무리 노무현을 띄우려 해도, 혹은 노무현을 지우려 해도 500만에 이르는 조문객들이 무엇 때문에 비통해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여권 내부에 무언가를 감지해 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가 하루 종일 TV앞에 붙어 앉아 영결식 과정을 지켜보고 난 뒤에 밝힌 소회는 비록 미학적 차원에서나마 비통해하는 국민들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그것은 ‘완벽’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그 실체를 ‘또 하나의 정부’라는 그 의도가 사뭇 의심스러운 수사를 통해 그가 발견한 것에 대한 일종의 ‘공포’와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식의 분명한 한계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지만, 적어도 정부가 마련한 형식적으로 깔끔하고 엄숙하게 제어된 영결식보다 훨씬 성숙된 무엇이 그 비통해 하는 자들의 행렬 속에 존재함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적잖이 충격을 받았음을 털어 놓은 것만큼은 분명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고인은 영면의 길에 접어들었다. 수많은 조문객들의 염원처럼, 그가 짐을 내려 놓고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란다. 남은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무엇이 그를 낳았고, 무엇이 그를 죽였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깊이 헤아려 볼 차례이다.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성근제 인하대 연구교수·중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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