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이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니까 거의 반세기 전 이야기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도 아니건만 덕수궁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대체 왜 그랬는지 국민이 영문을 알 겨를도 없이 서울시청 쪽으로 향한 덕수궁 담이 몽땅 헐리고 대신 쇠창살 울타리가 세워진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마치 몽드리앙의 그림을 모방한 듯 창살 군데군데를 노랑, 초록, 빨강색 등의 쇠판대기로 메워 놓았는데 나름대로 미학적(?)인 디자인을 한 셈이었다. 서슬이 퍼랬던 시절이라 국내에서 이렇다할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외국으로부터 빗발치듯 비난이 들어와 결국 이번에는 쇠창살을 헐어내고 담을 도로 쌓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이 ‘덕수궁 수난’ 사건은 약 1년 이상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을 다시 쌓을 때 이전 헐어냈던 돌들을 보관했다가 다시 사용했는지 지금 알 길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노년층에도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을 이 사건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누구 앞에선지 모를 창피함이 밀어닥친다. 권력자에 아부하는 ‘문화 장돌뱅이’ 중 하나가 당시 군사정권에 제안했을 터인데 실제 이유는 뭔가 팔아먹자는 수작이었겠지만 겉으로는 “고궁을 대중과 친하게 하자”는 알량한 이유를 내세웠을 것이다. 고궁은 시내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다가 보았다고 ‘친해지는’ 곳이 아니다. 접근하기 힘들기는 커녕 덕수궁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는 성의만 있다면 고궁은 들끓는 대도시의 일상을 벗어나 가을 같으면 낙엽이라도 밟으면서 호젓이 걸어볼 수 있는 곳이다. 오늘날 덕수궁을 호젓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어디라도 고궁의 맛을 즐기려면 따로 시간을 내어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고궁의 담을 헐어냈던 행위를 한 시대의 무지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서글픔이다. 지금은 그래도 약간 진정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조지 오웰의 풍자소설 ‘동물농장’에서 양들이 외치는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는 구호처럼 “벽을 허물자”는 말이 도처에서 들렸었다. 클래식과 대중문화의 벽을 허물자는 뜻인데 있지도 않은 벽이 대체 누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구호는 아직도 어디선가 들리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시민혁명이 없었던 까닭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수(minority)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듯하다. 현대 시민에게 어느 형태의 소수든 선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덮어두고 소수와 대중은 이미 정해진 계층으로 여겨진다. 독재정권 밑에서 살아온 까닭인지 대중을 기득권자들에게서 소외된 민중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대중문화를 즐기는 계층과 클래식을 즐기는 계층을 기정화하고 예컨대 공연장에서 “소외계층을 위해서는 클래식 공연은 안된다”는 딱한 대중문화 옹호론이 나오는 것이다. 소외계층은 고궁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말과 같다.
나날의 분주함 속에서 잠시 틈을 내어 고궁을 찾아 산책하는 것처럼 클래식이 왜 우리에게 정신의 양식이 되는지 알려주는 일은 거의 없는 반면 마치 대중에게 친절을 베풀듯 대중문화와 클래식을 한 솥에 넣고 끓인 잡탕을 대중에게 제공하면서 ‘열렸다’고 말한다. 클래식이라는 대상이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법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은 마치 고궁에 들어가지 않고 쇠창살 사이로 지나가며 흘낏 보는 사람들처럼 클래식의 참 맛을 느껴보지 못한 채 대중문화 옹호론에 의해 스스로 대접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클래식은 덕수궁처럼 우리의 곁에 가까이 있다. 코앞에 있는 곳에 다가갈 성의가 없는 사람들이 대중을 위한다는 구실로 “벽을 허물자”고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여기저기서 또 다른 ‘덕수궁 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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