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발키리’와 바그너의 ‘발퀴레’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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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바그너의 망령을 다시 한 번 우리 곁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발키리는 독일어 발퀴레의 영어식 발음이다. 작곡가 바그너가 무려 26년에 걸쳐 작곡한 4부작 음악극 시리즈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 바로 ‘발퀴레’이고 신들의 제왕인 보탄과 지혜의 여신 에르다 사이에 태어난 아홉 자매들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다니며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용사들의 영혼을 거두어 신들의 성인 발할로 데려가는 임무를 띠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에 열광했던 히틀러는 그 가운데 특히 ‘니벨룽의 반지’를 좋아했기에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한 극비 작전의 이름에 발퀴레를 썼던 것이다. 이 작전은 히틀러가 암살당하거나 축출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예비군 동원령이 발동되어 이들이 정부의 주요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나치정권을 수호하려는 계획이다. 그러나 히틀러를 제거하기로 모의한 비밀조직은 히틀러의 암살만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발퀴레 작전’을 역으로 이용해서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을 함께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이 연출한 대작 ‘지옥의 묵시록’에도 ‘발퀴레의 기행’이 등장한다. 미군 헬리콥터들이 평화로운 베트남 마을로 날아가 무차별 공습을 자행하는 잔혹한 상황이지만 이 거장은 오히려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영상으로 역설적인 웅변을 토해내었고 음악이 또한 그 의도를 절묘하게 살려주었다. 사실 ‘발퀴레의 기행’이 이처럼 유명해진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다고 할 만큼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떠올리게 되는 영화라면 ‘지옥의 묵시록’과 ‘작전명 발키리’ 사이에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 ‘반지의 제왕’이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한다는 반지의 설정도 그렇지만 그것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증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했던 영화 속의 골룸은 아무래도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난쟁이 알베리히를 떠올리게 한다.

권력보다 사랑을 쫓아 라인의 황금을 지키는 세 자매에게 차례로 접근해 보지만 결국은 놀림만 당하게 된 난장이 알베리히는 결국 사랑 대신 권력을 얻기 위해 라인의 황금을 훔치게 된다. 일종의 열등감이고 그에 대한 보상심리인 셈이다. 신들의 제왕 보탄이 계약과 법칙을 관장한다는 설정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의 신이면서도 스스로가 만든 세상의 이치이고 질서이기에 스스로가 어길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오히려 관습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영웅을 만들어 몰락해가는 신들의 세계를 수호해야 하는 고뇌와 몸부림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얻고자 하는 이는 절대 권력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우리 인간들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절대 권력의 반지를 손에 넣고서도 온전한 자유의지로 사랑을 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그래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히틀러가 그의 제국과 동일시했던 신들의 보금자리 발할 성은 끝내 불에 타서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신들의 세계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황금반지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은 채 원래 있던 라인 강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네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삶인 것이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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