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려서 읽은 그림(Grimm) 형제 동화 중에 ‘왕자와 부하들’이란 것이 있었다. 어느 아름다운 공주가 계모 여왕의 학대를 받고 감금돼 있다. 타국의 젊은이들이 공주를 구하러 찾아 오지만 나쁜 여왕이 낸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해 목숨을 잃는다. 어느 왕자가 다른 젊은이들처럼 모험을 하러 가는데 도중에 괴물들을 계속 만난다. 이 괴물들은 각기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놈은 눈알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 눈으로 천리를 볼 수 있고, 어떤 놈은 팔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 팔을 한없이 늘릴 수 있다. 또 어떤 놈은 무엇이든지 뱃속에 집어넣을 수가 있다. 왕자는 이런 괴물들을 하나씩 부하로 삼아 소부대를 만들어 나쁜 여왕의 성으로 들어간다. 여왕이 문제를 내는데 가령 ‘없어진 반지를 찾아내라’하면 반지가 호수 속에 있다는 것을 외눈이 금방 알아내고 배불뚝이가 호수물을 몽땅 마셔버리면 외팔이 팔을 길게 늘려 가져온다. 이런 식으로 왕자의 부하들은 무슨 문제든지 척척 해결해 마침내 공주를 구해낸다.
출판된 지 거의 200년이 되는 이 동화가 시사하는 바는 바로 ‘전문성’이다. 괴물은 전문가를 가리키며 왕자는 그 전문가를 적절히 운용하는 사람이다. 그림 형제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얼마 전까지, 혹은 어느 지역에선 지금도 전문가는 괴물처럼 보인다. 실생활에서 이들은 제한된 능력밖에 없고 그 능력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보여 평범한 사회에서는 유용하게 쓰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이 왕자의 부하들처럼 팀을 구성했을 때는 일반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들이 팀을 용이하게 구성할 수 있는 이유는 누가 보아도 그들의 능력과 무능력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하며 갑의 무능력이 을의 능력으로 보완되고 다시 갑, 을의 무능력이 병의 능력으로 보완될 수가 있다. 능력과 무능력이 보완되는 접합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들의 조직력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이와 정반대의 조직이 관료조직이다. 어찌 보면 한국 역사를 지배해 왔던 것이 강력한 관료조직이고 한국 사회 전반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교육 자체가 개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학 공부가 전공을 살리기 보다는 현대판 과거제도에 매달리다보니 일류학교와 유학에만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괴물’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어디에나 만능하다고 인정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다보니 무능력으로 보일까 겁이나 남에게 묻는 것을 할 줄 모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는 선무당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팀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열로 만들어진 조직에서 각자의 능력과 무능력이 드러나지 못하니 보완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줄줄이 내려오는 명령대로 뭔가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된다. 대개의 명령은 ‘어딘지 모르는 데 가서 무언지 모르는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이다. 조 직이라면서도 구성원들이 수시로 옮겨다니기 때문에 그저 얽어맨 것일 뿐 위기가 닥치면 삽시간에 우수수 흐트러질 허약한 조직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획일적이기만 했던 한국 사회도 어느덧 전문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경제 대통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가통치자에게까지 전문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 전문성이란 말이 입에 오르내린 지 10여년 정도밖에 안되니 만시지탄은 있지만 전문화되는 속도는 한국의 특징대로 빠른 것 같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세계와의 경쟁 때문일 것이다. 패기있고 민첩한 젊은 인력을 촉수로 이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경험과 감각으로 무장된 강력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무당들을 제거하고 괴물을 키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주를 빼앗아 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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