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은 문명을 발달시키고 문화는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신도시 등 개발은 문명의 발달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물질문명의 개발이 정신문화의 자원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문화의 자원으로는 유형·무형의 여러 지정문화재 및 비지정문화재 등이 있다. 고분은 그중 대개는 비지정문화재에 속한다. 경기도 일원의 기전지방에는 특히 고분이 많다. 역대 왕조의 능은 물론이고 종친이나 중신들의 유택을 대부분 수도인 한양 인근에 써왔기 때문이다. 이같은 고분은 고분마다 문화재 자원의 비밀을 갖고 있다. 연전엔 조선 중기 한 사대부 집안 마님의 분묘에서 당시의 의상이 출토되어 복식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됐다.
그런데 고분이 무단 발굴되어 문화재 자원이 유실되기도 한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분묘가 이런 경우다. 양절공의 분묘 소재지는 근래 개발붐으로 뜨는 파주지역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양절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趙溫 1347~1417, 조선초 문신, 본관은 한양(중략) 용원부원군 인벽의 아들이 어머니는 환조(이성계의 아버지인 자춘)의 딸이다. (중략)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이성계를 유달리 섬겨왔고 1388년(고려우왕 14년) 위화도 회군 때 이조판서로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며(중략) 이성계 추대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중략) 서북면 도순무사로 수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였고(중략) 1401년 태종이 즉위하자(중략)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중략)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렴 검소하였다’고 모두 45행에 걸쳐 그의 공적을 상술해놓고 있다. 가히 문무를 겸비한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재상이었던 것이다.
양절공의 분묘가 예사롭지 않을 것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태조로부터 받은 ‘정사공신조온사여왕지’(定社功臣趙溫賜輿王旨)의 국왕 문서가 기록유산으로 분류돼 보물 1135호로 지정된 것으로 미루어 또한 짐작이 가능하다.
1417년 5월18일 70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태종은 장례를 국장에 버금가는 예장(禮葬)을 치르면서 약 5만7천㎡의 임야를 묘역으로 내려 보기드문 사각석축묘를 축조한 묘석들은 591년 전의 석공들 손길이 이룬 옛 공예품이다. 묘역 자체가 개국공신의 장례의식과 생활사 연구가 가능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1980년대에 펴낸 초등학교 5학년 국정교과서 ‘훌륭한 분들’ (1)조온편은 8쪽에 걸쳐 이렇게 기술했다. ‘(전략)조온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데 노력한 분이다. 평안도에 침공한 왜구를 무찔렀고, 또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분란을 막기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중략)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벼슬이 높아졌지만, 그는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중략) 공신에게 내리는 곡식을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허름한 집을 고쳐주려고 하였지만 조온은 허락하지 않고,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도록 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정동에 있는 집에서 말년을 보낼 때였다. 어느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았다.(중략) 이야기하는 사이에 저녁상이 들어왔다.(중략) 상 위에는 보리밥과 반찬 두어 가지가 놓여있을 뿐이었다.(중략) “대감께서는 너무 몸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중략) “젊은이, 지위가 높아졌다고, 또 공이 좀 있다고 해서 호화롭게 지내서는 안되오. 나는 지금 나라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백성과 똑같이 검소하게 생활을 하는 것이 나라일을 돕는 길이라고 믿소” 젊은이는 조온에게 부탁해서 벼슬을 올려볼까 했던 마음을 크게 뉘우쳤다.(후략)
이러한 조온의 유택이 지난해 8월 어느날 돌연히 이장된 자리는 지금 어지럽혀져 있다. 후손들은 서로 이의 시비를 법정에서 가리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주요 관점은 부장품에 갖는 의문이다. 그리고 비지정문화재의 훼손이다. 지방문화재 지정이 추진됐던 비지정문화재다. 개발문명의 발달이 정신문화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현실이 안타깝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