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났다. 종전되고 약 한달 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한 첫 번째 큰 일은 오페라를 올리는 일이었다. 작품은 자유의 정신을 주제로 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였고 이때 지휘자였던 요셉 크립스의 증언에 의하면 제1막 앞부분 조용한 4중창에서 출연진, 지휘자, 관객들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쟁이 끝나자 오페라를 올리는 국민이 또 있을까? 바로 한국민이다. 1953년 휴전이 되고 한달 후는 아니지만 1년 후인 1954년 아직 폭격 맞은 잔해를 서울 시내 도처에서 볼 수 있던 시기에 시공관(현 명동 예술극장)에서 현제명 작곡 오페라 ‘왕자 호동’이 무대에 올랐다. 초등학교 1년생으로 객석에 있었던 나는 이 사건만으로도 한국민이 위대한 문화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도 세계 오페라를 이끄는 대표적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수백년의 오페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페라는 종전 후 그들에게 ‘배급 식량’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전쟁 후 오페라가 공연되었을 때 오페라 역사는 6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3년 동안 처참한 전쟁이 휩쓸고 간 후다. 배고픔이 오스트리아 국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했을 리가 없다. 비록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극소수라 하더라도 객석에 앉은 누구에게나 물질적 궁핍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의 오페라가 무슨 ‘반공 드라마’였다면 신기할 것이 없다. 그런 작품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문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기지 않은 사람이 그 당시 몇이나 되랴! 오페라에 왔던 사람들은 오페라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었다. 즐거움이 존재할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찌어찌 자금을 마련해서 무대에 올린 제작진이나 출연진에게는 공연 행위 자체가 자신들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 열정과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의 표현이었다. 그들의 연기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것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갈채함으로써 그 열정과 용기를 공유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연의 본질이며 이것이 살아나는 한 좋은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문제는 여타가 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 한파가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 경제 난국은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타격을 입는 것은 생업의 현장만이 아니라 소위 엔터테인먼트라는 공연예술도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구경은 무슨 구경…”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탓할 수가 없다. 오늘날 같은 때 문화의 각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어떠한 처신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공연처럼 일반인에게 티켓을 팔아야 하고 그들의 직접적 정서와 마주해야 하는 분야는 더욱 그렇다.
약 5년 전 어느 높으신 분이 “경제가 어려우니 문화를 뒷전으로 해야 한다”는 가슴답답한 소리를 했다. 비슷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위의 두 오페라 공연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전쟁 후의 ‘왕자 호동’처럼 문화가 더 첨예해진다는 사실을 그분은 분명 모르고 있었다. 공연에 종사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피델리오’가 ‘빵’이었던 것처럼 물질적 공황이 몰고 올 정신적 공황을 이겨낼 영양과 힘이 되는 ‘정신의 밥’을 찾아 제공하는 일이다. 티켓 값을 일부 낮추는 것도 하나의 도움이 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한가지 참고가 될 일화가 있다. 내가 즐겨 찾는 대중음식점 두 곳이 있다. 두곳 모두 맛있고 값이 저렴해 손님들이 항상 많았다. 재료 값이 한창 오를 때 한 곳은 맛을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값을 올린다고 크게 써붙이고 값을 올렸다. 다른 한 곳은 값을 그대로 두었는데 어느날 맛이 돌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전자의 집은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손님이 바글거린다. 내가 발길을 끊은 후자의 집은 이전과 달리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 성 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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