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의 범람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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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식집에 들어갔더니 시니어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주문한 음식에 대한 ‘해설’을 시작한다. 꽤 길어지기에 함께 간 손님과 얘기를 해야하니 그냥 놓고 나가라고 했는데도 무슨 고집인지 계속한다. 성가신 것을 참으며 듣고 있다가 “입 속에 넣으면 쫄깃쫄깃하구요…”하는 바람에 짜증을 내고 말았다. “내 입 속에 들어온 것은 내가 느낄 터이니 제발 나가시오”하고 나서 음식을 먹으려니 맛이 반감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동안 지난 후 음식 해설이 왜 필요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분명 손님들이 좋아하리라고 생각해서일 것이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지식을 갖게되면 그 음식이 고급이라는 확인을 하게되고 그러다보면 그것을 먹고 있는 자신이 상류층이라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내 입 속에서 느끼는 음식 맛조차 ‘개관적 지식’에 의해 ‘증언’되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이다. 다시말하면 입에 넣는 음식도 명품이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런 해설을 낳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클래식 음악에 해설을 곁들이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은 왠지 어렵게 느껴지는데 해설을 듣고 나면 쉽게 이해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설 전문가도 나오고 가지가지 해설이 범람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드물게 연주되는 작품에 대한 소개라면 나쁠 것 없지만 작품을 감상하는데 과연 필요한 해설인가 의심되는 경우도 많다. 음악대학 강의실에나 어울릴 분석을 해서 감상자의 해골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미인 대회에 해부학 교수가 나와 인체 설명을 하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보면 음악이 지금 흐르고 있는데 아랫쪽에 ‘제 1악장 알레그로. 경쾌한 제 1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시작되면 이어서 목관악기가…’ 어쩌고 하는 스크롤이 계속 지나가 음악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오페라의 경우는 무성영화처럼 변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오페라 자체를 보는 것보다 해설을 더 즐기는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왜 이런 그로테스크한 해설이 범람하는 것일까? 클래식 음악을 명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어딘가 드높은 곳에 있어 그것에 친숙해야만 상류층이 된다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음악을 듣고 느끼는 것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을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21세기에 음악을 듣는데도 계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때 “벽을 허물자”라는 구호가 외쳐지기도 했고 마치 그것을 실천하는 양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의 벽을 허문다는 구실로 성격이 다른 음악들을 한 솥에 넣고 끓이면서 “열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클래식(고전)음악과 오락음악이라면 몰라도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클래식음악은 근본적으로 대중 지향적이라야 하며 또 대중적인 것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논어나 성경이 고전 중의 고전이므로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공연장 이름에 신주를 모시는 곳을 의미하는 ‘전당’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한 시대의 의식을 반영한 예라 하겠다.

이런 명품의식이 대중이 클래식 음악에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음악은 느끼는 것이지 결코 이해하는 것이 아니므로 낯선 음악, 친근한 음악은 있어도 어려운 음악, 쉬운 음악이라는 개념은 없다. 클래식 음악이 얼마든지 대중에게 친숙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명품의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어느정도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설의 난무를 진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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