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방한 ‘餘錄’ 여록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8명이다. 1954년 제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비롯해 어제 1박2일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떠난 부시 등이다. 이 중간에는 존슨(1966년) 포드(1974년) 카터(1979년) 레이건(1983년) 조지 HW 부시(1992년) 클린턴(1993년)이 다녀갔다.

이어 레이건 방한 때까지는 거국적인 환영행사가 펼쳐졌다. 서울은 물론이고 도심지 곳곳에 대형 환영 아치가 세워졌다. 미국 대통령의 카퍼레이드 차가 지나는 곳엔 오색 꽃가루가 뿌려지고 연도에는 수십만 군중이 나와 환호했다. 첫 방한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서울시청 앞에서 차가 더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시민이 운집해 차에서 내려 군중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의 방한은 대선 공약이었다.

레이건 방한 때까지는 거국적인 환영 분위기가 이어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랬다. 카퍼레이드가 없어지고 연도의 환영 군중이 준 것은 아버지 부시부터다. 그러나 방한을 반대하는 반미 시위는 없었다. 방한 반대, 반미 시위가 생긴 건 아버지 부시에 이어 방문한 이번의 조지 W 부시가 처음이다. 서울광장에서는 보수진영의 ‘환영’, 청계광장에서는 촛불부대의 ‘반대’ 집회가 서로 맞불을 놨다.

예전의 환영 군중이 대부분 동원된 군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관이 동원한 관제 군중이기 때문에 환호한 것은 아니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도록 도와준 혈맹의 우의, 수년동안 보릿고개 춘궁기에 미480 잉여농산물을 무상지원한 데 대한 고마움의 정표였던 것이다. 그 무렵 나라 사정은 미국의 농산물을 그저 준다해도 가져올 능력마저 없었던 처지에 실어다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그같은 미국의 우의와 호의는 자기 나라를 위한 원려이긴 했다. 자국의 젊은 장병 수만 명을 희생해가며 북의 침략을 저지한 것은 동북아 정세의 거점 확보를 위해서다. 잉여농산물은 농산물 수급상 태평양에 버려야 할 것을 준 것이다.

하지만 어떻든 미국은 고마운 나라였고, 그래서 그 나라 대통령이 오는 것은 반가운 손님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 달라진 현실은 금석지감을 갖게 한다. 물론 달라진 것은 진보세력의 일부이긴 하고, 달라지지 않은 보수세력도 예전에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한·미 관계는 비대등적 관계에서 대등적 관계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보수나 진보나 다 같은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화된 다원화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 역시 필연적이다. 문제는 이번의 부시 방한을 반대한 반미시위가 진보주의도 아닌 종북주의에 의한 반미 책동이라면 얘기가 다르단 사실이다.

보수의 입장에서 보아도 미국의 대국주의, 부시의 패권주의는 눈에 거슬릴 때가 있긴 있다. 그러나 패권주의는 부시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동북아 좁은 지역에서 일본과 중국의 두 나라 패권주의 틈새에 놓여 있다. 이를 견제하는 힘의 균형을 위해서는 미국을 원용하는 것이 국익이다. 이 또한 보수나 진보나 다 같은 입장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친북도 아닌 종북주의자들 같으면, 미국을 ‘제국주의’로 보고, 부시를 ‘수괴’로 보는 그들의 방한 반대·반미시위는 국익과 상반된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이념적 사상의 공동기(空洞期)다. 보수나 진보나 모두 논리와 현실의 괴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예컨대 보수가 금과옥조로 삼는 성장은 빈부격차의 심화를 가져오고, 진보는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도 모순을 낳고 있다. 이래서 보수는 진보를 빌려 허점을 보완하고, 진보는 보수를 참고로 모순을 보완한다. 보수와 진보가 상호 접근하는 이 시대는 그래서 이념보단 실용주의가 앞선다. 이러한 이념의 제로(0)화 단계를 넘게된 언젠가는 또 새로운 이념이 출현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의 보수주의, 진보주의는 당초의 출발이 대체로 보수냐 진보냐에 따른 구분일 뿐,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다. 하물며 이념도 실패의 낙인이 찍혀 폐기된 지가 오래된 사회주의, 그도 ‘우리식사회주의’를 고집하는 평양정권의 종북주의 맹종이 상존하는 것은 유감이다. “만경대정신 이어받자”는 사람을 두둔하고 나서는 위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현대 국제사회는 어차피 나라 대문을 빗장 걸고 살 순 없다. 평양정권처럼 폐쇄사회로 살다간 제 나라 인민 하나 못 먹이고 배 곯여 여기 저기 손벌리다 안 되면 국제 망나니 노릇하기 십상이다. 북녘을 돕는 것도 종북주의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굶는 인민을 돕는 동포애이기보다는 평양정권을 돕는 이념적 우군의 성격이 짙다.

부시는 한·미동맹 강화를 거듭 확인 하고, 별 다른 일은 없이 갔다. 그의 방한은 성남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예포 21발의 발사가 환영행사의 전부였다. 호들갑을 떨지않고 검소하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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