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예술인가, 순수예술인가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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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이란 말은 이제 초등학생도 쓸 만큼 보편화했다. 자기 혁신, 기술 혁신, 경영 혁신, 기업 혁신, 정부 혁신에서 보듯 요즘의 혁신은 주로 전 지구적인 통합 시장경제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행동 방침으로 신봉된다. 대부분의 명사 앞뒤로 붙여 써도 그리 생소하지 않은 접사의 자격까지 얻은 듯하다. 개선에서 개혁으로, 개혁에서 다시 혁신으로 진화했으니 혁신은 개선의 손자뻘 쯤 된다. 현 정부도 역시 혁신을 뜻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맨 앞에 내세웠다. 그러나 혁신이라는 말 자체부터 혁신하고 싶은 모양이다. 혁신도시라는 말에서 나는 노무현 냄새, 참여정부 냄새 때문인지 혁신을 대체할 다른 단어를 여태껏 찾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리니 말이다.

지난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에는 기초예술진흥과가 있었다. 2006년 10월 공연예술팀과 전통예술팀으로 분리되면서 부서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기초예술은 그 언어적 공민권을 더욱 확장해 갔다. 그러나 지난 이른 봄 새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는 도무지 이 기초예술이란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인지적, 실천적 예술 개념의 재구조화를 꿈꾸면서 대체로 순수예술의 자리를 대신하던 기초예술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다시 순수예술에게 밀려났다. 순수예술에서 진화한 기초예술이 원래의 순수예술로 고스란히 회귀한 것이다. 기초예술이, 또 순수예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 이름을 두고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일까. 기초예술은 이제 무효인가.

순수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비순수와 불순은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것이 들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순수예술은 오랫동안 대중예술, 상업예술, 응용예술의 상대 개념으로 쓰여 왔고, 한때는 이념적 편가르기의 희생물로서 민중예술의 대척점에 놓여지기도 하였다. ‘대중’, ‘상업’, ‘응용’, ‘민중’의 함의를 추상해 보자면 상업성과 정치성이다. 이 상업성과 정치성이 바로 바람직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도 국어사전은 순수예술을 ‘예술의 절대적 독립성을 주장하는, 예술 지상주의적인 예술’이라 풀이하고 있다. 우리 머리에서든 사전에서든 순수예술을 두고 내리는 이러한 정의는 요즘의 시대적 가치를 담아내지 못한다.

기초학문, 기초사회, 기초과학, 기초생활 등에서처럼 기초는 사물의 밑바탕을 이른다. 순수가 온실 속 화초처럼 그 자체로서 보호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면 기초는 뿌리뿐 아니라 그 지향하는 바가 있어 끊임없이 확장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순수예술이 가치중립적, 자기완결적, 중심고정적인 데 반해 기초예술은 가치지향적, 자기출발적, 중심이동적이다. 순수예술이라 말하는 순간 예술은 별나디 별난 수요·공급 체계로 편입되어 버림으로써 예술가는 사회무능력자로, 예술 감상자는 여유작작한 호사가로 전락할 위험성이 농후하다. 순수예술은 ‘그들만의 예술’일 공산이 크고, 기초예술은 ‘우리들의 예술’일 가능성이 열려 있다.

예술이 그냥 좋은 것일 뿐이라는 단순한 믿음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 기초예술이다. 존재가치는 물론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도 숭상될 수 있다. 예술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은 이를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은 예술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잘 모른다. 바로 여기에 기초예술이라는 말의 자기정당성이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이가 즐겨 썼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는 어리석다. 기초예술은 그 언명만으로도 예술, 또는 이전의 순수예술에 대한 강력한 정책 의지를 담고 있다. 예술을 고갱이로 하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창구효과를 엄지로 꼽는 이명박 정부에 더 어울리는 말은 순수예술이 아니라 기초예술이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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