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개혁의 차이

‘생산에 타격을 주는 투쟁’을 다짐했다. “정부의 탄압이 계속된다면 전기를 끊고 철도를 멈추는 방식으로 수위를 더욱 높여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쇠고기 총파업 출정사다.

쇠고기 파업은 노동조건과 무관한 정치파업이다. 정치파업의 정당성을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것’으로 끌어다 대는 강변이 있다. 논리의 비약이다. 파업이 가능한 근로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 도모는 어디까지나 노동조건과 연계되는 구체적 문제에 국한한다. 근로자의 지위향상 도모를 포괄적으로 확대, 제반 문제에 무소불위의 행동권을 방임, 무법천하를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 전국의 물류를 마비시킨 화물연대 파업은 노동조건과 유관한 생계형 파업이었으므로 일주일만에 정상화가 가능했다. 대화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형 파업은 불법이어서 대화가 될 수 없다. 단속의 대상이다. 앞으로의 단속 과정에서 물리력 충돌이 걱정된다.

이른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공안정국으로 몰아대는 세력이 있다. 경찰의 과잉진압을 트집잡지만, 과격시위가 원인 행위다. 부끄럽게도 지난 29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촛불집회의 일부 군중을 ‘폭도’라고 보도했는가 하면, 중국 인민일보계의 환추시보, 프랑스 AFP 등 외신 보도는 ‘폭력’으로 규정했다. 경찰차를 불지르고 쇠파이프를 휘둘러대는 폭력을 방관할 공권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공권력이 개입하는 수사는 마땅하다.

마치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던 독재정권의 공안정국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폭력시위 수사를 ‘공안정국’이라고 우기지만 당치않다.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를 연상케하는 민중 저항으로 쇠고기 문제를 이명박 퇴진으로 몰고 가지만 역시 당치않다.

지금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제1공화국의 자유당 독재도 아니고, 제4공화국의 유신독재도 아니고, 또 제5공화국의 전두환에 대해 6월항쟁을 일으켜 민주화를 쟁취했던 당시의 상황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재자는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의 다원화사회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 선거는 이에 최대공약수를 찾는 민주주의의 정치 방법이다. 이에 불만이 있으면 또 다음 선거에서 투표로 제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응징 수단이다. 이명박이 능력은 의심스러워도 독재자는 아닐뿐만 아니라, 미국 쇠고기 협상에 잘못은 있어도 그같은 오류에 재협상을 안 하고 추가협상을 한다고 해서 물러나라고 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불만이 있으면 내후년 지방선거도 그렇고, 다음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안 찍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을 묻는 민주주의 방식이다.

한데, 쇠고기를 빙자해 정권 퇴진으로 몰고 간다. 수입된 미국 쇠고기에 미친 소를 잡은 쇠고기는 없다. 그런데도 있는 것 처럼 미친 쇠고길 들여온다고 자꾸 우긴다. 볼셰비키 혁명 수단인 민중 선전선동을 방불케 한다. 물론 미국 쇠고기를 둔 반정부 세력이 그런 사람들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오만을 일깨울 진보세력으로 사회개혁을 위해 더불어가야 된다.

유감인 것은 더불어가야 할 진보세력이 투쟁 일변도로도 모자라 폭력화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8대 국회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퇴조된 연유가 뭣인가를 돌아봐야 한다. 촛불집회에 모인 괄목할 군중이 반드시 진보세력의 지지자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현명한 성찰이 있어야 할 때다.

‘전기를 끊고 철도를 멈추는 방식의 강경 투쟁’은 차마 할 일이 못되고 또 그런 일까진 없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투쟁의 강도를 다짐하는 말일지라도,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다. 궁금한 것은 뭣을 위한 투쟁이냐는 것이다. 노동단체가 장외정치에 휘말리는 것은 노동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이명박 정권을 질책하는 게 법 테두리 밖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법 테두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 혁명과 개혁의 차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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