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교도관, 우학종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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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마다 그 안에는 제복을 입고 총을 휴대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존재한다. 군인, 경찰관, 교도관이다. 군인이 국경선을 접해 국가방위라는 대외적 규찰을 임무로 한다면 경찰관, 교도관은 사회방위라는 대내적 전선, 즉 대범죄진압을 위한 수사와 형집행 업무를 각각 나누어 관장하고 있다. 긴요하고 위험한 임무를 상징하듯 그들에게는 제복과 총이 주어져 존재감의 고취와 직무에 대한 정려(精勵)를 독촉한다.

그리하여 일반인이라면 젊은 한 때 병영시절의 추억으로나 간직되는 긴장의 무게들을 언제나 일상(日常)의 어깨에 등짐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나 평시에는 이렇게 구분되는 듯한 집단별 임무도 전시(戰時)가 되면 하나가 되어진다. 모두의 총구는 침입자를 향해 급박하게 돌려지고 집중되어야 한다. 전쟁은, 총을 지닌 자의 의무는 전사(戰士)여야 하고, 그 권리는 무한하고 장엄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스스로 일깨워 준다.

6.25때도 그랬다. 전방지역에 위치했던 모든 경찰관, 교도관은 군인이었고, 전투병이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주저항선이 일시에 무너져 버린 혼란의 와중에서도 적을 맞아 물러서지 않고 군인처럼 싸웠고 무수한 제복의 사나이들이 전사로서 삶을 마감했었다. 후방에서도 교도관은 이미 군인이었다. 도처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들은 경찰서, 교도소를 1차적 표적으로 삼아 기습을 일삼았고, 이들을 퇴치하고자 특별경비대를 조직 전투함으로써 또 많은 제복의 사나이들이 다치고 산화해야 했다. 제복의 영광이라면 마음이 아리고, 무기의 그늘이라면 더욱 아픈 역사이리라.

역사의 폭력과 야만은 전장(戰場)을 펼쳐 평범했고, 또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많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또는 비겁자로 재단하는 만용을 거듭해 왔었다. 그러나 그 오만한 역사의 행간을 누비면서도 고개를 들어 기어코 영웅으로 남겨지는 사람들은 있고, 남다른 그 기개(氣槪)로 인해 오래도록 후대에 기려지고 기억된다.

개성출신 우학종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 개성은 남한 땅이었고, 거기에 개성소년형무소가 있었는 바 우학종은 형무소장이었다. 소개(疏開) 지시를 받지 못한 그가 형무소를 공격하는 북한 정규군을 맞아 휘하 형무관들에게 전투명령을 하달할 때 쯤 개성시내는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고, 적의 선봉은 이미 포천과 동두천에까지 진출한 시점이었다. 그는 80명의 형무관 및 자원하여 탄약을 나르던 소년 재소자들과 함께 장장 10시간을 버티며 싸워,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침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전투로 화력이 바닥나고 사상자가 급증하자 이길 수 없는 그의 전쟁을 마감하고 부하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나라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싸웠다. 훗날의 승리를 기약하며 이곳을 포기하자. 후퇴의 책임추궁이 있으면 소장의 명령에 따랐다고 전해라.” 그때 우학종의 비감했던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냐마는 그는 부하들의 퇴각을 명령한 뒤 스스로의 몸에 총을 겨누어 자결함으로써 장렬히 산화했다. 훌훌 털고 떠날 줄 아는 그 용기로 영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돌아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있다. 청계산 자락 아래 비록 작은 흉상으로 앉았으나 제복을 입고 영웅을 이야기 한다. 큰 바위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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