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한 젊은 날 그가 본 것은 온통 처절한 삶의 현장뿐이었다. 휘발유로 온 몸을 태우며 평화시장 육교를 뛰어내리면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던 전태일이 그러했다. 태평로 거리의 최루탄과 물대포 등에 맞서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 가투대열이 그러했다.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던 신림동 거리의 김세진·이세호가 그러했다. 혈혈단신 북한을 전격 방문했던 문익환이 그러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은 의심할 여지 없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마르크스 경제학과 비마르크스 경제학의 구분만 있을 뿐이었다. ‘창작과 비평’의 참여는 탐독의 대상이고, ‘문학과 지성’의 순수는 기피의 대상이었다. 개인의 입신을 위한 어떤 노력도 죄악이었고, 오직 고통 받는 민중과 식민지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몸 바치는 게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성으로 정금 같이 단련된 강령이 그의 유일한 깃발이었고.
노동계급과 식민지 민족의 진지이던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투쟁의 현장에서 동지들이 하나 둘 밥벌이를 위해, 권력을 향해 떠나가는 것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도 이제 자신의 젊은 날 신념이 흔들릴 수 없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386이 권력을 틀어지고 그들의 도덕성이 여지 없이 내려 앉을 때까지도,
‘문학과 지성’ 출신 시인이 진보적인 국립대 총장이 되는 사이에 ‘창작과 비평’ 출신 촉망받던 시인이 나이 오십을 넘어 겨우 상 하나 받는 것을 보면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버티고 있었다. 해체니 텍스트니 중용이니 중도니 하는 것들을 기웃거리면서도 그 마지노선은 결코 허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누워 있는 런던의 테임즈 강변에는 공기업 민영화 추세에 따라 폐허가 된 제철소를 유수 재벌 기업이 리모델링해 만든 ‘테이트 모던’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선 ‘변기’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뒤상과 함께 먼 레이, 피카비아 등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예의 리얼리스트가 우연찮게 이곳을 살피면서 다음과 같은 해설에 주목한다. “대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들의 키 워드는 단순성과 경제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 중에 최상의 가치로 삼는 자유를 잃지 않으려면 생생하고 순진하며 행복한 예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카비아는 또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의 그림들은 사랑의 행위 들이다.” 한편 먼 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한 가장 위대한 결과를 위한 가능한 가장 작은 노력이 그의 모토라고. 그런가 하면 뒤상은 저렇게 넌지시 말하며 결정적으로 그의 경계심을 풀어 버린다. “매 순간, 매 숨결은 지금 여기에서 새겨지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토록 버티던 근대 이성의 도달점이 여기라면 이제 물질도 파동도, 리얼도 모던도 결국은 자유, ‘스스로 말미암음’에서 만나고 마는 것일까? 그런 관점에서 서서 그는 ‘절로 무장해제시키는’ 뒤상에게 1등을, ‘경제의 참 원리를 선언하는’ 먼 레이에게 2등을, ‘연애를 해 본 자는 누구나 한번쯤 되뇔법한’ 피카비아에게 3등을 매기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리버럴이나 로맨티스트라고 이름 붙이는 게 과연 될 법한 이야기이기나 한 것일까?
윤한택 기전문화재연구원 전통문화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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