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욧” 초등학생 여아의 말은 쌀쌀맞았다. 노인이 민망해 했다. 하수구에 흘린 지갑을 주워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다. 어른 손은 안들어가고 아이들 손만 들어갈만 한 틈새였기 때문이다.
마침 지나다가 이를 본 딸아이 아빠가 한마디 했다. 영문은 모르지만 노인을 대하는 여식의 태도가 못마땅 했던 것이다. “너, 어른한테 말 버릇이 그게 뭐냐?”고 나무랐다. “엄마가 도와주지 말라고 했거든요!”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가버렸다.
그만한 사연이 있다. 그로부터 얼마 전이다. 친구들과 학교를 마치고 가는 길이다. “얘들아! 누가 날 도와주지 않을래?” 중년 남자의 길거리 당부다. 승용차 의자 새로 들어간 자동차 열쇠를 좀 꺼내달라는 것이다. 그도 공교롭게 아이 주먹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저요… 저요!” 하며 서로 돕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 남자는 “그럼, 너한테 부탁할까”하고 맨앞 아이를 지목했다. 둘이 승용차 안에 들어간 아이가 어렵잖게 꺼낸 열쇠를 주고 받으며 서로 눈을 찡긋해 보였다.
집에 간 그 아이는 엄마에게 길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삼아 얘기했다. 아이 엄마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매를 들었다. 아이는 “과자 사준다고는 안했단 말야!”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 누가 과자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라는 엄마의 타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 사준다고는 안했어도, 자동차에 태운 채 그대로 가면 어쩔려고 차에 타긴 왜 타니!?” 엄마의 말은 절규였다. 아이를 붙들고 엄마도 눈물을 쏟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엄마는 차에 태운 채 딸 아이를 유괴했을 걸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사실 무리가 아니다. 학교에서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 미덕으로 배운 것을 실천하다가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 딸 아이는 아예 어른을 불신하게 된 것이다. 역시 무리가 아니다. 이도 공교육 붕괴의 한 현상이다.
안양의 혜진·예슬이 두 어린이 참사 사건 충격이 아직도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이런 참에 일어난 40대 남자의 일산 초등학생 여아 납치 미수사건은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세상에 그 어린 것을 승강기 안에서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다 못해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마구 끌어 당겼다. 야차 같은 몹쓸 짓에 놀란 아이는 지금도 아마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 폭력으로 얼버무려 사건을 사나흘이나 잠재우던 경찰이 범인을 서울 사우나탕에서 잡은 것은 화난 대통령이 경찰서에 쫓아가 질책한지 6시간 만이다. 대통령이 나서지 않았으면 아직도 못잡았을 것이다.
경찰조직이 왜 이 지경이 됐는가, 염불보다 젯밥에 마음을 둔 탓이다. 파출소는 민생치안의 초소였다. 민생과 가장 가까운 파출소를 없애고 새로이 만든 무슨 ‘지구대’는 파출소도 아니고 경찰서도 아니다. 경위 승진을 시험이 아닌 근속연한제로 바꾸고 나서는 경사·경장·순경보다 간부가 넘쳐나 내부 기강이 문란해졌다. 외근 형사는 3D업종이 되어 너도 나도 내근을 희망, ‘형사가 경찰의 꽃’이라던 것은 옛말이 됐다. 경찰개혁이 절실하다.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다니는 주부들의 ‘치안불신’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안양의 정 아무개, 일산의 이 아무개 범인은 상습범이다. 상습범을 관대하게 처리하니깐, 모방범죄의 초범이 생기고 초범이 또 상습범이 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미성년자 성폭행범에 전자팔찌를 끼워야 한다니까 인권 침해라고 한다.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혜진·예슬이법’을 법무부가 추진한다니깐 인도주의에 어긋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극형으로 다스린다고 예방이 되는 게 아니라고도 한다.
그럼, 그 값싼 인권주의자와 알량한 인도주의자들에게 묻겠다. 어떻게 하면 예방이 가능하단 말인가, 없다. 극형으로 다스리는 응보형주의가 예방의 절대적 효과는 갖지 못할지라도, 상대적 효과는 갖기 때문에 사회방어의 차선책인 것은 마땅하다.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우선시하는 감상은 인권주의도 인도주의도 아니다.
어린이가 어른을 믿지 못하는 불신 풍조는, 어른이 어른들끼리 믿지못하는 불신풍조보다 더한 전율을 느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미성년 성범죄자를 엄단하지 않고는 전율적 병리현상의 척결이 더 어렵다. 평화의 나라 스위스도 어린이 성폭행은 사형까지 처하지 않는가, 어린이 보호를 위한 공동체사회 의식을 적극 구축해야 한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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