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국가입니다. 최근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한류는 그런 전통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전통문화의 현대화와 문화예술의 선진화가 함께 가야 경제적 풍요도 빛이 날 것입니다. 이제는 문화도 산업입니다.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문화강국의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문화수준이 높아지면 삶의 격조가 올라갑니다. 문화로 즐기고, 문화로 화합하며 문화로 발전해야 합니다. 정부는 우리 문화의 저력이 21세기의 열린 공간에서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지난달 25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중 문화를 언급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향후 문화정책의 가늠자는 ‘문화도 산업’이며,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문화강국의 기반을 다져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이명박 정부의 모두 192건의 국정과제 중 핵심과제(43건)로 문화부문에선 오직 ‘핵심 문화 콘텐츠 집중 육성 및 투자 확대’만을 포함함으로써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문화강국으로 나아간다는데 환영하지 않을 국민들이 어디 있으랴마는 헛헛한 느낌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것은 왜일까?
‘문화도 산업’이라는 선언은 눈꼽만큼의 이의를 달기도 차마 불경스런, 이 시대의 당연한 화두일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뼉만 치기에는 아직은 석연찮다. 자칫 문화의 경제적 부가가치만 지나치게 중시되다 보면 문화를 도구로 2차 상품을 만들어 파는 문화산업 기업들의 배만 불릴 것 같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방에는 여전히 가난의 곰팡이가 슬고, 훌륭한 예술 감상에 목마른 국민들의 발길은 더욱 높아진 문턱에 번번이 가로 막힐 것 같다. 한 나라 문화정책의 본령과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영국의 문화매체체육부 장관을 지낸 테사 조웰은 ‘정부와 문화의 가치(Government and the Value of Culture)’라는 글을 통해 “결핍, 질병, 무지, 불결, 나태 등 베버리지의 다섯가지 물질적 빈곤에 하나를 더해 ‘열망의 빈곤(The Poverty of Aspiration)’”이라고 부르고, “이의 퇴치를 위해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최고 수준의 뛰어난 예술에 소수가 아닌 모두가 적극 동참하게 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여기서의 예술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기초예술이 아니겠는가. 창조형 예술산업인 기초예술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편집·복제형 문화산업 발달은 불가능하다. 저작권을 매개로 이뤄진 문화산업의 다층적 구조에서 핵심 역할은 기초예술이 맡고 있다.
지난 글에서 필자는 “문화산업의 진짜 뿌리는, 그것만 해서는 밥도 얻어먹기 어려운 기초예술”이라고 썼다. 국가 문화정책에서 우선돼야 할 것은, 그러므로 기초예술이다. 이는 마땅히 기초예술의 창작 진흥과 그 향수 확대를 함께 아우르는 표현이어야 한다. 창작이든 향수든 기초예술로써 ‘열망의 빈곤’을 채우려는,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욕구는 ‘개인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생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적 생산력의 원천이 되는 창의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배고 또 낳는다. ‘문화강국의 기반’을 다지는데 필요한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이란 다름 아닌 기초예술을 만들고 즐기는 데서 나온다.
테사 조웰은 그 자체로서의 문화(Culture on Its Own Merits)를 지원해야 하며 문화를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정부의 정책에 앞서 행해지는 가치판단은 피사체를 담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달리하는 카메라의 앵글과 같다. 정책도 사진도 앵글에 따라 전혀 딴판이 된다. 문화산업 정책은 문화를 그 자체로 옹호하는 관점에선 문화정책이지만, 경제적 이윤 획득의 수단으로 삼는 관점에선 경제정책이다. 문화와 예술을 만들고 즐기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문화정책이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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