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미친 나라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기자페이지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뭔가에 미쳐야(狂) 한 경지에 이를(及) 수 있다는 뜻이다. 대가나 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한다. 진실로 위대한 사람은 단 한번뿐인 인생을 걸만한 뭔가를 찾아 그것에 미쳐 사는 마니아다. 마니아가 많은 시대일수록 위대한 시대고 행복한 세상이다. 그리고 미칠 수 있는 대상을 많이 허용하는 두꺼운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이 특정 물질적 대상인 돈, 얼굴, 몸 등에 미쳐 있다. “부자 되세요”라는 새해인사를 하며,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런데 요새 미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 새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온 나라가 영어에 미쳐 있다. 한 때 ‘미친 영어(크레이지 잉글리시)’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영어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영어로 세뇌시키는 학습법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필두로 인수위원회가 영어 전도사로 나섰다. 영어 전도사들은 영어를 잘해야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온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설교를 열심히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 존재를 규정한다. 우리가 한국인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어로 말하고 쓰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국가와 민족 가운데 자기 말과 글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만약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한국어로 말하면서 한문을 쓰는 언문불일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깨우쳐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조선시대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문에 통달해야 했다. 우리 시대 영어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로 계급이 나눠지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 이상으로 그 시대에서는 한문 해독이 신분 차이의 표지가 됐다.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이 평등한 민주사회다. 그래서 조선시대처럼 양반만 한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빈부차이를 초월해 모든 학생들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도록 공교육을 강화하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교육 개혁안은 매우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영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을 들으면서 뒤바뀐 세종대왕 말이 생각났다. “우리 말이 미국말과 달라, 영어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어린 학생들이 미국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영어 전용수업을 만드나니, 모든 학생이 영어를 쉽게 깨우쳐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세상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미친 것인가? 세상이 변했고, 변한 세상에서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영어에 미쳐야 한다.

이런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세종대왕은 아마 한글을 창제하신 것을 후회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지 않으셨다면, 온 국민이 영어를 국어로 사용해 영어에 미치기 위한 이런 생쇼를 벌이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다. 요즘 학생들에게 세종대왕은 야속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런데 진정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영어 훈민정음을 만드는 세종대왕이 되고자 함인가?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