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농촌진흥청은 없애버리고 원예연구소는 민영화 한다는 보도를 듣고서 원예연구소장을 지낸 사람으로서의 견해를 밝힌다.
원예연구소는 우장춘 박사님이 초대 소장인데 처음에는 민간기구로 출발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3월 8일에 우장춘 박사님은 일본에 어머니와 가족을 모두 남겨둔 채 혈혈단신으로 한국의 원예 산업을 부흥시키고자 귀국하여 50년 5월 8일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재단법인으로 설립하고 소장으로 취임, 농업연구와 후진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다가 53년 5월 20일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중앙원예기술원으로 정부기구화 됐다. 이 때는 정부가 부산으로 피란을 가 있었을 때였는데도 민간기구로는 농업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으로 정부기구화 한 것인데 원예연구소를 다시 민영화하겠다는 인수위의 결정은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을 가 있던 자유당 정부의 결정보다도 훨씬 뒤진 무지몽매한 결정이다. 우리나라의 농업발전을 위해 단신으로 귀국, 10년간을 고군분투 하시다가 돌아가신 후 농촌진흥청 내에 묻혀 계시는 우장춘 박사님께서 통곡하실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예연구소가 처음에 민간기구로 출발했던 이유는 당시 혼란기에 정부기구로서의 출발이 어려웠기 때문인데 피란정부에서 정부기구로 만든 것을, 실용성을 추구하는 17대 대통령 정부가 민영화 한다는 조치는 납득할 수가 없다.
원예연구소가 민영화되면 실용성이 높아지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원예연구소가 국가기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원예 산업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연구라는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패를 자주 하게 되고 수많은 실패를 토대로 최종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면서 2천 번의 실패를 하였기에 전구가 만들어졌다. 매독치료제인 페니실린의 이름이 606호인데 이것은 605번의 실패를 거듭한 다음 606번째의 실험에서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민영화된 원예연구소나 다른 1차 산업분야의 연구기관에서 이렇게 거듭되는 실패를 용납해 줄 것인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한 두 차례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실패를 자주 하는 연구자는 즉시 자리를 내 놓아야 할 것이다.
원예연구소가 최근에 개발, 일본시장에서 극찬을 받고 있으며 한 번의 전시회를 통해 500만달러의 수출계약을 따낸 국화품종 ‘백마’는 육성기간만도 10년의 세월이 소요됐고 3만주 이상의 국화가 필요했다.
우리나라의 농업에 꼭 필요한 이런 기술이 하루아침에 개발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기술이 실용화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 노력과 연구자의 열정을 필요로 한다. 원예연구소를 비롯 농업연구 기관이 민영화되면 이런 효율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하는 인수위의 말은 허구이거나 무지의 소치다.
농촌진흥청은 왜 필요한가? 연구자의 머릿속에서 구상돼 오랜 시일에 걸쳐 개발된 기술도 농가에 보급되기 전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농가에 피해가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개발된 기술을 다양한 지역에 맞는지 또는 실효성이 있는지 하는 점들을 검토하기 위해 지역적응연락시험, 생산력 검정시험, 농가 실증시험 등등 많은 단계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농가에 기술이나 품종을 보급하고 새로운 기술을 채택하는 농가에 기술을 교육하고 보급하는 일을 농촌진흥청이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농촌진흥청을 폐지하면 개발된 기술이나 품종이 농가에 보급되는 통로가 차단되기 때문에 실용화 되기가 매우 늦거나 어려워진다. 농촌진흥청 안에 우장춘 박사님의 묘소가 있다. 인수위의 이번 결정을 우장춘 박사께서 아신다면 지하에서 길이 통곡하실 일이다.
임명순 전 원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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