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생산’의 문화정책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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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정치와 사회 영역의 담론을 이끌어온 민주주의의 문제가 문화 부문으로 옮겨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대형 시설 확충 위주의 문화정책을 전개한 제5공화국 때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문화가 만나 만들어낸 최초의 단어(숙어)는 ‘문화의 민주화(The Democratization of Culture)’이다. 그러나 이 문화의 민주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바뀌면서 그 지향하는 가치가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고급문화의 보급과 확산을 중심으로 한 기득된 문화 권력의 시각에서 펼쳐진 담론이기 때문이다.

1991년 부산에서 처음 등장한 노래방은 현재 전국적으로 4만여곳에 이른다. 이 노래방은 예로부터 음주와 가무악(歌舞樂) 등을 즐긴 우리 민족의 모든 놀이들 가운데 그 인기 면에서 단연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을 음치로부터 탈출시켰다는 부수적인 성과 또한 적지 않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면 누구나 가수이며, 누구나 예술가다. 취기를 깨우려는 목적을 넘어 노래 몇 곡으로 자신과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아울러 일상의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일반적인 예술이나 축제의 기능과 다를 것이 없다.

한편 1990년대 말부터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디카(디지털 카메라)는 벼르고 별러 찍던, 그러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그때까지의 사진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즉석에서 확인한 다음 지우거나 다시 찍을 수 있고, 또 포토숍으로 조정할 수 있는 디카의 즉흥적 기능은 기록성과 사실성과 지속성에 기초했던 기존의 사진을 새로운 놀이의 하나로 거듭 나게 했다. 더 나아가 디카 사진은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영상(Visual) 의사소통을 위한 기호로서의 의미를 획득했으며, 이에 디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미지나 기호의 단순한 수용자에서 적극적인 생산자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노래방과 디카는 인간이면 누구든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데서부터 출발한 ‘문화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의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엘리트 중심의 문화를 지역적, 또는 계층적 소외자에게 더 많이 누리게 하는 게 문화 민주화의 기본 가치라면, 모든 이들에게 내재된 창의성과 창조적 역량을 인정하고 이를 계발하는 것이 문화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민주화는 예술에의 접근성과 예술 교육, 그리고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문화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실제 즐기는 문화 활동을 우선시하면서 문화의 평등성과 다양성 등을 존중한다.

사용자가 제작한 콘텐츠(User Created Contents)라는 뜻의 UCC를 보라. 개인 프라이버시와 저작권의 침해, 정보와 상징의 조작 등 갖가지 우려 속에서도 UCC는 이 시대 문화현장의 당당한 총아다. 참여와 공유와 개방이라는 웹2.0의 정신이 문화민주주의의 이념과 결합해 탄생된 UCC는 ‘지금’이나 ‘여기’ 우리들이 즐기는 최신식 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UCC의 문화적 지위를 인정한다고 해서 물론 자신의 예술적 신념에만 충실한 전통적인 고급문화 생산자들의 역할과 가치를 폄훼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다만 그들의 창작 행위와 그 작품의 보급·확산을 앞에 두는 문화정책이 수정돼야 함을 지적할 뿐이다.

최근 몇년 새 나눔과 베풂의 이름으로 여러 문화예술 단체들의 ‘찾아가는 문화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이들에 대한 공공부문의 지원 또한 적지 않으나, 이 나눔과 베풂의 문화정책은 문화 권력의 남용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비록 ‘그 밥에 그 나물’이라도 주민들의 참여와 생산 등을 기본 양식(樣式)으로 하는 지역 축제가 ‘찾아가는 문화 활동’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시장에서의 고급문화 보호정책은 마땅히 지속돼야 하겠지만, 이제 문화정책은 ‘나눔과 베풂’ 보다는 ‘참여와 생산’을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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