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명절 때마다 늘 꼭 같은 식단으로 음식을 먹듯, 해마다 한글날 관련 기사는 늘 비슷비슷하다. 올해는 남북정상회담 덕분에 남북 언어에 대한 기사의 비중이 높아졌지만, 최근 4~5년 사이 한글날의 고정 레퍼토리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칭송과,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말이 파괴되는 최근의 현상에 대한 우려로 늘 채워지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말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은,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들이다.
사실 나도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에 당혹스러운 때가 종종 있다. ‘열공’(열심히 공부하다)이나 ‘넷심’(네티즌의 마음) 같은 단어들이 그랬고, 뭐라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외계어’(인터넷에서만 쓰이는, 문자와 기호를 뒤섞은 상당히 어려운 은어적 표현들)는 더더욱 그랬다. 소통이 안 될 때, 그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일단 당혹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그러나 나는 몇 년 내내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들이 우리말 파괴의 주범으로 지탄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끔 반감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지금 우리말에 닥친 위기의 가장 큰 가해자가 신조어를 남발하는 청소년들일까? 그저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보다는 어른이 수시로 섞어 쓰는 영어들이 훨씬 더 우리말을 훼손시킨다고 보인다. 생각해 보라.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는, 비교적 한국어적 상상력을 동원한 말들이다. ‘열공’이나 ‘얼짱’, ‘쌩얼’ 같은 줄임말도 모두 우리말을 바탕으로 줄인 것이니, UCC니 OSMU 같은 영어를 바탕으로 한 신조 용어들과는 비교될 수도 없을 만큼 쉽게 이해된다. 게다가 ‘된장녀’ 같은 단어들은 그 발상에서 우리말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연상을 동원해야만 이해되는 말이다. ‘머리에 X만 들었다’는 말과, ’X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한다’라는 표현들을 다 이해해야만, 허영기 넘치는 여자를 지칭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재미있는가.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의 인터넷 신조어와 은어들은, 언어 사용자 스스로 이를 은어나 속어라고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어사전에 등재될 단어가 아니고 점잖은 공식석상에서 쓸 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50, 60대들도 젊은 시절 ‘아더메치’나 ‘짜가’ 같은 은어를 썼지만 그것이 우리말을 그리 심각하게 파괴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들의 은어와 속어 사용은, 늘 있게 마련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영어 사용은 다르다.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신조어 창출은 불가피하다고 치자. 그러나 공식적인 발표문이나 뉴스에까지 나오는 ‘어젠더’, ‘로드맵’, ‘블루오션’ 같은 말들을 이토록 남발해야 할까 싶다. 이런 말의 남발에는 우리말 표현이 없다기보다는, 새로운 흐름에 뒤쳐지지 않았다는 과시의 측면이 훨씬 커 보인다.
그뿐 아니다. 아예 조사와 접사를 빼놓고는 모두 영어로 바꾸어 쓰는 현상도 늘어나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그쪽 어젠더를 억셉트해줬는데, 그쪽에서는 자꾸 아규하는 거야. 모두 오픈 마인드해야 프로세스가 되지, 안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쁜 말버릇이라고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때만 되면 청소년의 인터넷 언어가 우리말을 망친다고 성토하는 어른들이 바로 이들이다.
과연 누가 더 우리말 파괴의 주범일까? 청소년들이 지탄당하는 것은 정말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만만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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