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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 교류사는 12세기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에도 이씨 왕조가 있었고 그 왕자인 리 즈엉 꼰이 경주에 도착했다가 강원도 정선에 입적(入籍)함으로써 정선(旌善) 이씨 가문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3세기에는 베트남 이씨 왕조의 또 다른 왕자인 이용상(李龍祥)이 고려에 들어와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됐다는 기록이 족보에 나와 있다. 이같은 혈연적인 교류는 5천년 역사에서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단일민족 신화를 깨뜨리는 작은 돌멩이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혈연적 교류가 아닌 중국에 간 사신들 간의 문화적 소통이 있었다. 조선 사신과 베트남 사신은 중국 북경에서 만나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시를 주고 받았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조선 사신들은 베트남을 동아시아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18세기 말 베트남에서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을 침공했다. 이미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으로서는 이런 청의 군사적 대응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군주인 정조는 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근대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권 내 있었고 근대에서 중화질서가 무너지면서 똑같이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다. 20세기 초 한국과 베트남 애국지사들은 인도인, 버마인, 필리핀인들과 연대해 ‘동아동맹회’를 결성한 뒤 반제국주의 투쟁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이같은 동맹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 한국과 베트남은 똑같이 남북으로 분단됐다.
한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분단이 고착됐다면, 베트남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룩했다. 따라서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베트남은 분단된 조국을 어떻게 통일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모범사례로 인식됐다. 당시 베트남은 한국의 386세대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등불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역사의 반전이 일어났다.
근대에서 인간은 세계사적으로 크게 2가지를 목표로 설정했다. 하나는 통일된 민족국가를 성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이다. 먼저 통일의 관점에서 보면 베트남이 한국의 미래지만, 경제성장의 관점으로는 한국이 베트남의 미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은 20세기에서와 같은 일방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밀어주는 상생의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한국과 베트남의 연대가 동아시아 관점에서 중요한 이유는 쌍방이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어야 하는 동시에 신중화주의 팽창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근대에서는 중화주의가 동아시아 질서를 규정했다면, 근대에서는 일본의 대동아주의가 동아시아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21세기에서 한국과 베트남 공동의 염원은 전근대와 근대의 제국(주의)적 지배관계를 청산하고 동아시아를 평화와 공동번영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필자는 21세기 탈제국주의적 동아시아지역공동체 건설은 중국과 일본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 같은 피압박민족이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김기봉 경기대사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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