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세계는 국경을 넘어 더욱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로 인해 국가 간 경쟁이 심화하고 어느 한 국가의 경제·사회현상이 그 국가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다른 나라에 파급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한 단면이다. 우리는 지난 1997년 말 달러 부족으로 온 국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외환위기를 겪은 바 있다. 그 당시 외환 보유액이 30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현재는 2천5백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제는 달러의 과다 보유 여부에 관한 논쟁이 일고 있다.
“달러화 표시 자산을 매각하여 달러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차손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한국은행 총재의 국회 상임위 답변 한 마디에 전 세계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가격이 폭락하는 것이 오늘날 지구촌 경제의 현실이다.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우리 경제가 성장했다는 점에서 기분 좋은 소식일 수도 있으나 한 나라의 경제문제가 과거와는 달리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그만큼 경제문제 해결이 어려워지고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프리드먼은 ‘숨겨진 질서(Hidden Order)’라는 책에서 “관심이 적은 다수와 이해관계가 걸린 소수가 정치적으로 부딪칠 경우 반드시 후자가 승리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법률이나 정책이 1천만 명에게는 1인당 1만원씩 총 1천억원의 손실을 발생시키지만 500명에게는 1인당 1억원씩 총 500억원의 이익을 발생시킨다면 이 법률이나 정책은 시행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관심이 적은 다수는 숫자만 많을 뿐 결속력이 약한 반면에 큰 이익을 지키려는 소수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나 법이나 정책은 소수의 이해 당사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2003년에 서울~부산 사이를 2시간대에 주파하는 경부고속철도가 10년이 훨씬 넘는 긴 공사를 마치고 개통되었다. 설계도면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착공하였던 경부고속철도의 경우 예산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수배나 늘었으며, 공사 기간도 수년간 연장되었다. 국가의 대역사라고 하던 시화호가 15년이 넘는 오랜 공사 끝에 1990년대 중반에 완공되었다. 서해안의 지도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방대한 사업이었던 이 공사는 엄청난 공사비만 날린 채 주변 공단에서 흘러드는 폐수와 생활하수로 커다란 환경재앙을 예고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이제는 시화호의 수문을 개방하여 무늬만 호수일 뿐 바다와 다름없으니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선거철만 되면 지하철 노선이 변경되어 수백억원의 공사비가 추가되는 등 이와 유사한 정책 결정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국가적 대사인 대선도 불과 9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이 사회의 엘리트인 식자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이 남발하는 선거 공약들이 시기적으로 합당한가, 이 공약들이 시행될 때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가, 소요예산은 얼마이며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 등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여 자기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 사업에 대해 국민들이 깨어 살피지 않으면, 위정자들이 판단착오를 범한다고 해도 이를 시정할 기회를 잃고, 그로 인해 국민들은 큰 희생을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식자들은 자기 자신의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이웃, 특히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불행한 여건에 처한 이웃들의 처지를 비롯해서 자기가 속해 있는 기업이나 기관, 그리고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의 경제문제를 걱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배운 사람의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이기 때문이다.
/임 덕 호 한양대학교 경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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