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음악예술 대학에서 발견된 안익태 선생의 학적 기록은 선생의 해외 유학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발견된 공식적인 대학 학적부라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안익태 선생은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뒤 1936년 유럽에 건너와 각국에서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코다이 졸탄, 폴 힌데미트 등 저명한 음악가들에게 수학하거나 이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음악 활동을 폈다.
그러나 이는 선생을 아는 지인들로부터 말로 전해진 것일 뿐 지금까지 그의 유학 기록이 담긴 학적부가 발견된 적은 없었다.
◇ 리스트 음대 1938-1939 학적부 = 안익태 선생의 친필 기록 뒤에 붙인 학적 기록표에는 선생이 배웠던 교수 명부가 기록돼 있다. 음악 작곡의 경우 코다이 졸탄(Dr. Kodaly Zoltan), 바이올린-첼로는 쉬페르 아돌프(Schiffer Adolf), 실내악은 바이너 레오(Weiner Leo), 합창 지휘는 웅게르 에르뇌(Unger Erno)로 돼 있다.
버르토크 벨러와 함께 헝가리 민속 음악을 집대성한 코다이와 안익태 선생과의 관계는 선생이 코다이로부터 사사했다는 얘기가 전해졌을 뿐 구체적인 물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었다.
선생이 리스트 음대의 외국 특별 입교생이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학적 기록은 물론 생존해 있는 코다이의 미망인 등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이를 증언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학적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선생이 코다이로부터 작곡 이론을 배웠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며, 당시 음대의 교수법으로 볼 때 안익태 선생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수학하면서 자작곡에 대한 코다이의 견해를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헝가리 음대에서는 훌륭한 음악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고 평가받는 것과, 자기 자신의 작품을 만든 뒤 평가받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한 시기가 1935년 11월로 추정되고 있는 만큼 선생이 민속음악의 대가인 코다이에 애국가를 들려준 뒤 이에 대한 의견을 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밖에 안익태 선생이 수학한 쉬페르는 당대 최고의 첼로 연주자 중 한 명이었고, 실내악을 가르친 바이너 역시 헝가리 최고의 실내악 전문가 및 작곡가였다.
버터 언드러시 리스트 음대 총장은 "당시 헝가리 음악은 절정기였으며, 그 시기에 명성을 떨치던 각 분야의 대가들로부터 수학했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 학적부 친필 기록 = 1938년 10월16일에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1938-1939년 학생 등록부에는 안익태 선생의 친필 기록이 담겨 있어 이목을 끌고 있다.
보호자 이름에는 'Ahn, Dungook'으로 표기돼 있고 괄호 안에는 '미망인'이라고 돼 있다. 부친 안덕훈 씨가 돌아가신 상황이어서 모친 김정옥 씨의 이름을 평안도식 발음으로 적고, 성은 서양식으로 부친의 것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국적과 모국어란에는 일본과 일본어라고 적혀있으나, 주소란에는 당시 일본 주소 위에 '조선'(chosen)을, 괄호안에 '코리아'(Korea)를 써넣었으며, 출생지란에도 '재팬'(Japan) 앞에 '평양, 조선'(Pyeng Yang, chosen), 괄호 안에 역시 코리아로 기록,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있다.
생년월일은 1911년 12월5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선생이 1906년생이지만 당시 나이가 많을 경우 입교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이렇게 표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경력란에는 1930년 도쿄 아카데미뮤직 음악 학사, 1936년 필라델피아 음악학교 음악 석사라고 표기돼 있으며, 헝가리 내 주소는 부다페스트 6구역에 있는 '외트뵈시'(Eotvos) 학생 기숙사라고 적혀 있다.
안익태 선생은 자신의 종교가 '장로교'(Presbyterian)이며, 직업은 지휘자, 작곡가라고 기재했다. 서명란에는 영문으로 'AHN EAKTAI'라고 쓴 뒤 한자로 친필 서명도 했다.
◇ 외트뵈시 기숙사 명부 = 안익태 선생이 3년간 머물렀던 부다페스트 외트뵈시 기숙사 명부를 보면 그의 이름은 3년간 음악 작곡 전공 분야에 이름이 올라 있다.
1938-1939년과 1939-1940년 2년간은 담당 교수가 코다이 졸탄으로 돼 있으며, 마지막 해인 1940-1941년에는 시클로시 얼베르트로 돼 있다.
첫 해 기록에는 이름 옆에 '외국인 장학생'이라고 명시돼 있어 헝가리 정부가 외국인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또 1939-1940년에도 학교 측으로부터 외국 장학생의 자격은 아니지만 등록금과 학비를 면제 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외국인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1년 간만 받은 것에 대해 리스트 음대 측은 애초 1년 동안만 공부하기로 했다가 나중에 2년을 연장했거나 뭔가 장학금 지급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현재는 헝가리 최고의 인문대학인 엘테(ELLT) 대학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는 외트뵈시 기숙사는 당시 최고의 학생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입실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엘테 대학의 김보국 교수는 "안익태 선생이 거주했던 기숙사는 현재는 부다페스트 11구역에 편입돼 있는데 당시 이 겔리르트 언덕 지역은 부다페스트 최고의 고급 주택가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기숙사 건물은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손상된 뒤 일부 보수 공사를 했지만 골격과 외양은 그대로 남아 있다.
◇ 첼로 콘서트 프로그램 = 학적부와 함께 발견된 안익태 선생의 개인 첼로 콘서트 프로그램은 선생의 첼리스트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켜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안익태 선생이 당시 코샤 죄르지의 피아노 반주로 에클레스, 헨델, 바흐, 슈트라우스 등의 곡과 함께 자작곡인 '백합(Lily)'와 '목가곡(Pastorale)' 등 총 9곡을 연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버터 총장은 코샤가 헝가리가 낳은 최고의 음악가인 버르토크 벨러의 수제자로, 당시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익태 선생이 코샤의 반주로 첼로 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당시 선생의 높은 위상을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익태 기념재단의 박정미 실장도 "안익태 선생이 버르토크 수제자인 코샤의 반주로 리사이틀을 열었다는 것은 새롭고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며 선생의 첼리스트로서의 역량이 재조명 받을 수 있는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콘서트 프로그램에는 '17일 오후 8시30분'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연도 및 시기가 빠져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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