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시동이 걸려 최근 들어 연기 인생을 활짝 펴고 있는 이문식(40)이 올 들어 세 번째 주연작을 들고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3일 개봉하는 '플라이 대디'(감독 최종태, 제작 다인필름ㆍ가드텍)에서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 가장 장가필 역을 맡았다. 부장으로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둔 가장. 비록 앞으로 7년이나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야 하지만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가장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시련이 닥친다. 노래방에 놀러갔다 웬 남학생한테 딸이 맞고 와 병원에 입원한다. 가해 학생과 부모에게 사과를 받으려 하지만 학교 교감이 나서서 "이 학생 부모는 나랏일로 아주 바쁜 분이며, 사실 피해 학생도 잘못한 게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협박에 가까운 회유를 한다.
맥없이 돌아서는 그를 향한 딸의 불신의 시선과 아내의 허탈한 시선. 장가필은 가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고등학생 고승석(이준기)을 만나 맹훈련에 돌입한다. 훈련하는 과정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이 만화 같은 과정을 이문식의 생생한 연기가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배우에게 뭔가 해낼 '거리'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영화를 위해 12㎏를 찌웠다 다시 20일 만에 빼야 하는 것도 배우에겐 해내야 하는 일이죠. 무엇보다 장가필이 소심한 가장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태어나는 변화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원작 소설도 그렇고, 시나리오도 단숨에 읽어 내려갔죠."
맨 처음 훈련을 시작할 때 그의 배는 관객의 자연스러운 웃음을 자아낼 만큼 일반적인 40대 남성의 '사장님 배'다. 12㎏를 찌우기 위해 이틀에 하나씩 케이크를 먹고, 밤에 치킨과 술은 기본이었으며, '더 이상 배 안에 들어갈 데가 없다'고 느낄 때 또 뭔가를 먹어댔다.
촬영이 시작된 지 20일 만에 이제는 살을 빼야 했던 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혀를 내두를 일. 생식 먹고, 오이와 당근으로 입의 공허함을 달랬으며 살은 빼면서도 근육은 키워야 해 닭 가슴살을 먹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건 촬영 현장.
"버스를 쫓아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정말 수도 없이 달렸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 거죠."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을 했지만 의외로 장가필이라는 캐릭터는 쉽게 이해됐다. 이문식 자신이 소심한 A형.
"저 역시 장가필과 마찬가지 성격이에요. 만약 접촉사고를 당했어도 사고를 낸 사람이 큰소리를 치면 전 아무 말도 못하죠. 경찰서 가고, 사람들이 혹시나 나 알아봐서 입장이 더 곤란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지레짐작해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요. 그리곤 집에 와서 화를 내는 식입니다."
그래서 장가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상 살다 보면 그런 생각 들잖아요. '난 열심히 살아왔는데, 난 누굴 괴롭힌 적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라는. 장가필도 그랬을 거예요. 사랑하는 가족에게 하루아침에 무능한 가장으로 낙인찍히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되든 안되든 뭔가를 하려 했을 겁니다."
장가필의 파트너는 고등학생 고승석. 17:1의 싸움에서도 승리했다는 전설적인 싸움꾼, 3년 연속 고교 복싱 챔피언인 가해학생마저도 때려 눕힌 인물이다. 승석이라는 인물을 이문식은 장가필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고등학생에게 싸움을 배운다는 설정이 말이 되나요. 그렇지만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장가필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봤어요. 나도 몰랐던 내 모습, 그런 거 있잖아요. 살다 보면 이쪽만 보고 다른 쪽은 못 보고 살았는데, 승석이와 훈련을 하면서 그런 모습을 찾아가는 거죠. '반경 1m밖에 못 보고 살아가도 좋아'라는 등 승석이가 가필에게 하는 대사도 또 다른 가필이 가필을 향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한 친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문식을 연기자의 길로 걸어가게 만들었던 그 친구는 지금 열심히 일만 하고 딸 둘을 공주처럼 모시고 산다. 적당히 배가 나왔으며 청춘 시절의 고민은 사라진 채 어떻게 딸들을 잘 키울까 고민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삶은 보이지 않는.
"지금은 40대가 된 386세대가 장가필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당신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거죠. 영웅이 별 건가요?"
그래서 그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으로 맹훈련 끝에 버스를 따라잡는 신을 꼽았다.
"버스를 따라잡았을 때 이미 장가필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링 위에 올라가서 싸우는 장면 등은 덤이죠. 버스 안에 있던 직장인들이 박수를 치는데, 어찌 보면 유치할 수 있지만 찡한 감동이 전해졌어요."
화제를 바꿔 주연급 배우가 된 것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사실 이미 개봉한 '공필두'나 '구타유발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으니 부담이 될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시나리오 보는 눈 좀 키우라고 쓴 글도 봤다"며 껄껄 웃는 그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진지한 답변을 이어갔다.
"영화를 처음 했을 당시 '연극을 했다는 사람이 연기를 그 정도밖에 못하느냐'는 말을 듣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고, 단역 출연 후 출연료를 깎자는 제작사의 말에 가슴 아픈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옛날을 회상하는 이문식은 "주연이 되니 내 이름이 적힌 의자도 있다. (주연이 돼)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아졌지만 책임져야 할 부분도 많다. 그래서 돈 내고, 시간 내 찾아오는 관객에게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다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조연으로 출연할 당시에도 이문식은 어느 작품에서나 눈에 띄는 배우였다. 연기력과 함께 자신이 해야 할 몫을 분명히 알고 맥을 짚어가는 배우였다. 그런 그가 한 영화를 책임지는 주연 배우로서 관객에게 보다 당당히 설 날이 기다려진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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