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장동건· 이정재 ‘카리스마’ 격돌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진일보했다.
지난해 ‘태극기 휘날리며’가 보여줬던 가능성을 한층 업그레이드한 작품이 탄생했다. 지난 1년여 숱한 화제 속에 제작돼 온 ‘태풍’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액인 순제작비 150억원이 투입된 ‘태풍’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탈북자 출신 동남아 해적 씬(장동건 분)이 남한을 향해 가공할만한 테러를 계획하는 이야기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UDT 출신 최정예 해군대위 강세종(이정재 분)이 투입돼, 태국과 러시아, 부산 등지를 오가며 씬과 추격전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살아 남은 씬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이미연 분)가 남한의 미끼로 등장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태풍’은 외형과 구조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일단 스케일이 크고 스케일에 어울리는 중량감과 볼 거리가 있다. 주인공에겐 절박한 미션이 주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선 주인공이 불사조가 된들 별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내용적으로는 한국화에 성공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의 아픈 현실을 무리없이 녹여냈다. 탈북자들의 아픔과 한은 창작해낼 수 없는 소재이며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남북의 처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이 블록버스터에 어울리게 응용됐다. 질퍽함과 촌스러움 등은 줄어든 대신 오락성과 감각이 더해졌다. 같은 신파도 이처럼 재료의 선택과 요리법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밑그림이 제대로 갖춰진 구조 속에서 장동건과 이정재라는 두 스타가 한판 신명나게 놀았다. 각자 여한이 없을 정도로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토해 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깡마르고 까만 외모에 상처와 문신으로 장식된 얼굴과 몸, 입 등을 벌리면 번득이는 쇠붙이 치아와 긴 고수머리, 강한 이북 사투리. 이젠 내재된 카리스마를 끌어 내는 방법을 알게 된 장동건은 이러한 찬란한 외모에 힘입어 화면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죽이게 했다. 여기에 이미연과의 상봉장면에서 눈에 핏발 세운 그의 울부짖음은 방심하는 사이 눈물을 왈칵 쏟아 내게도 한다.
그동안 남성미 넘치는 강인한 캐릭터에 목말라왔던 이정재는 물 만난 고기처럼 스크린 속을 누볐다. 단정하고 절제된 모습의 이정재는 분출하는 장동건과 팽팽하게 균형을 맞추며 극을 안정시켰다. 애국심과 인간애 등으로 뭉친 해군 대위는 까딱하면 코웃음을 유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이정재는 그 수위를 잘 조절했다.
태국과 러시아의 로케이션과 동남아를 누비는 해적의 모습은 생생한 이국적 재미를 더하며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해양 액션 역시 크게 흠잡을데 없이 박진감 넘친다.
‘007 시리즈’의 악당이 아닌 한국인이 세상을 전복시키는 무지막지한 계획을 세우고, 주인공이 타고 있던 배에 어뢰가 터져도 살아나는 등 영화는 ‘태풍’이란 제목을 가질 만한 파워가 있다.
한국영화의 크기와 내실이 커졌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돼 반갑다.
이제 과제는 세계 시장이다. 이런 영화가 국내용으로만 소비된다면 그때는 분명 낭비될 것이다. 국내 시장은 기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힘에 부쳐했던 일을 ‘태풍’이 해내길 기대해본다.
단순 액션의 무협이 아닌, 김기덕 감독의 예술영화가 아닌, 한국 블록버스터의
성공 소식이 듣고 싶다. 오는 14일 개봉.
●섹스와 철학
마흐말바프의 ‘사랑에 관한 독백’
국내외 블록버스터들의 공세가 12월 극장가를 달구는 가운데 시류와 상관 없는 예술영화 한편이 조용히 개봉한다.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섹스와 철학’이 지난 9일 종로필름포럼(옛 허리우드 극장)에서 관객들을 맞았다.
영화는 마흔살 생일을 맞아 지나온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려는 한 댄스학교 교사 조언의 이야기다. 그에게 지나온 삶은 네명의 여자들로 요약된다. 사랑을 빼놓고는 삶을 논할 수 없다는 조언의 사랑에 대한 담론이 펼쳐지는 것. 이 과정에서 댄스학교 학생들은 꾸준히 집단 무용을 선사하는데 이 광경이 대단히 이색적이다.
특히 팔을 이용한 전위적인 동작들이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애절하게 느껴진다.
조언은 생일날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들 네 여인을 댄스학교에 초대한 후 한명씩 붙잡고 이들과의 사랑을 반추한다. “모든 사랑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돼”라고 믿는 조언은 네 여자와의 만남을 모두 운명이라고 여긴다. 제3자 시선으로 볼 때는 중년 남자의 젊은 여자 꼬시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육체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대신 시적인 대화를 나눈다. 다른 서구 영화들과는 180도 다른 접근법.
이 중년 남자의 욕망은 한 여자와 춤을 추듯 손을 에로틱하게 포개는 단 한 장면만으로 표출될뿐 그 외에는 모두 대화를 통해 소화된다. 다분히 이란적(?)인 것. 결국 댄스학교 학생들의 온몸을 이용한 현대무용이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진정한 사랑의 순간은 단 몇초, 몇분 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은 없다”며 결국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돌아온 건 외로움뿐”이란 우울한 결론이 나온다.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진 한 중년 남자 하소연은 영화 앞뒤에 등장하는 맹인가수의 구슬픈 노래를 통해 정점을 찍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단풍길과 눈밭은 스러져가는 중년을 상징한다.
그러나 찰나일지라도 사랑은 행복한 것. 지금은 모든 게 덧없다고 느끼는 주인공이지만 마흔살 생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부터 새 출발을 운운했던 그이기에 더욱 그렇다.
●애인
‘쿨’한 척 만났지만 비틀거리는 男女
“날 갖고 놀아줘” 남자가 여자에게 내뱉는 말이다. 그것도 만난 지 불과 한두시간만에. 남자의 저돌성에 처음에는 기막혀 하던 여자도 이내 남자에게 끌린다. 둘은 만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서로에게 맹렬하게 빠져 든다.
한가지 특징은 둘의 만남이 처음부터 시한부였다는 점. 남자는 다음날 외국으로 떠날 예정이고 여자는 7년 사귄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영화에선 남녀 주인공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를 일탈의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다. 하루동안의 불장난을 즐기자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둘은 섹스를 즐긴다. 어느 한쪽이 화대를 지불하지 않으니 둘은 연애하는 것이요, 둘의 관계는 애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성인 남녀간의 걷잡을 수 없는 끌림과 이어지는 섹스는 많은 멜로영화에서 묘사했던 이야기다. 대단히 도발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는만큼 그동안 빈번하게 영화화됐을 터. 그중에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시 주연의 ‘데미지’같은 명작도 있다.
말초적 흥미를 넘어 가슴을 두드리는 감동까지 전해준 것. 그러나 ‘애인’은 아쉽게도 감동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제작사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가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가 50억원으로 치솟는 현실에서 이 영화는 순제작비 13억원으로 만들었다. 한국 영화의 모범답안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영화의 짜임새는 그런 규모의 경제가 미덕으로 느껴지게 하지 못했다.
주연배우 성현아와 조동혁은 영화의 성적 코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으나 관객의 감정이입을 이끄는데는 실패했다. 이들의 짧은 사랑은 여행지에서의 그것처럼 무책임하고 즉흥적이란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으나 그들 사이의 대화나 교감 등은 지극히 단선적이다. 특히 여자가 사랑하지 않는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둔 상황인만큼 낯선 남자에 대한 끌림이 얼마든지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나 본능에서 시작된 사랑을 그리려던 둘의 원데이 스탠드는 채 끓기 전에 상에 내놓은 수프가 돼버렸다.
단순한 재료만으로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는데도 불 조절 실패와 손맛 부족 등으로 제맛이 나지 못했다. 지난 8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