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중앙일간지 경제부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자신을 ‘통합적 진보주의자’로 분류했다. 그의 생각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점에서 눈길을 끈다.
독일 슈뢰더 정권의 사회개혁에 꽤나 매력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슈뢰더는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 좌파나 독일 좌파나 영국 블레어의 ‘제3의 길’이나 유럽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정권이 분배 우선으로 치달아 방만한 적자재정으로 가고 있다. 그의 통합적 진보주의의 반영인가 싶다. 통합적 진보주의는 대통령의 표현이다. 중도 좌파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고전적 유럽 사회주의를 통합적 진보의 모델로 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필자는 중도 우파의 입장이다. 온건 개혁에 동의한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도 좌파, 즉 통합적 진보주의를 배척할 생각은 없다. 중도 우파나 중도 좌파나 다 건강한 측면에서 고찰하면 상호 보완의 관계를 갖는다. 물론 다소간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금 겪고 있는 국내 혼돈의 본질은 이런 원론적 개념의 차이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념 논쟁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갖는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가 갖는 슬픔이다. 원론적 개념의 차이보다는 대북 관점이 논쟁의 본질이 됐다.
평양 정권을 협량하게 대하면 꼴통 보수로 매도된다. 평양 정권을 관대하게 대하면 깨인 진보로 대접 받는다. 더 나아가 친북을 하면 선각자 대우를 한다. 예컨대 중국 공산당 의용군의 한국전 참전엔 일언반구의 말이 없다. 미군의 한국전 참전은 ‘통일내전’에 대한 침략이라고 힐난한다. 같은 외세 개입인 데도 평가가 다르다. 미군이 중국 의용군보다 먼저 참전했으며 아직껏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양 정권이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침략행위는 통일전쟁으로 미화하고 침략에 대한 방어는 제국주의로 깎아 내린다.
이에 사용되는 주술이 ‘민족’이라는 용어다. ‘민족자주’ ‘자주통일’은 평양 정권이 가장 즐기는 대남 최면술이다. 통일 방안에서 저들이 남북연합제가 아닌 남북연방제를 고집하는 덴 ‘민족자주’ ‘자주통일’의 깊은 함정이 있다.
연방제가 되면 주둔 미군의 철수가 불가피하다. 남쪽 군사력은 북쪽 군사력에 비해 게임이 안 된다. 평양 정권이 다시 쳐들어와도 연방제하에선 정말 내전 형태가 되어 나라밖에선 방관만 해야한다.
일국 일당의 공산주의엔 원래 국제공산당만 있을 뿐 민족의 개념은 부정됐다. 민족이란 말은 공산주의 혁명의 저해 요인으로 지탄됐다. 광복 직후 건국을 유보하는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우익과 함께 좌익세력도 적극 반대했다. 그러다가 하룻밤 새에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한 게 모스크바의 지령에 의해서였다. 그 당시엔 좌익이 오히려 외세 진영이었고 우익은 만족 진영이었던 것이 지금은 우익이 외세 세력이고 좌익이 민족 진영인 것처럼 됐다. 광복 이후 60년의 세월이 참 무섭다.
그렇다고 평양정권과 반목하거나 싸우자는 것은 아니다. 미우나 고우나 동포다. 북녘을 지배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집단이다. 대화를 해야하고 교류를 해야 한다. 돕는 것도 좋다.
그러나 제 정신이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국기인 나라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제 정신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을 방해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유혈 책동속에 건국됐다.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려면 무엇때문에 그토록 피를 흘리며 나라를 세울 필요가 있었겠는가, 한국전쟁 땐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지 않으려면 그냥 내줄 일이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목숨을 초개같이 희생했는가를 생각해볼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을 지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남북 분단으로도 모자라 심한 이념적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은 이 정권 들어 더욱 심화한 현상이다. 국토의 분단에 겹친 국가의 분열, 즉 분단국가 더하기 분열국가는 참으로 힘든 고통이다.
간곤하게 나라를 세우고 지킨 대한민국이 있어 오늘의 ‘노무현’이 대통령자리에 있다. 그의 ‘통합적 진보주의’가 보는 나라의 정체성은 뭣이며, 대북관은 뭣인 지에 대해 진솔한 생각을 듣고 싶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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