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를 들이 받았다. 뺑소니쳤다. 7㎞쯤 가다가 중앙선을 넘었다. 역주행으로 마주오는 승용차와 부딪치고는 멈춰섰다. 뺑소니 운전자는 처음 들이받쳐 뒤쫓아온 승용차 운전자에게 붙잡혔다.
연쇄 가해차량 운전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가 0.231%의 만취상태였다. 성남 분당서 사고를 내기 시작하여 광주 오포에서 사고를 끝마친 이 분은 인천의 부장검사다.
검사는 사회공익의 대표 기관이다. 사회공익을 대표하는 검사가 이런 저질적 반사회성을 저지른 예는 일찍이 없었다.
청주에서는 판사가 술에 취해 남의 승용차를 훔쳤는 지, 혼자 생각으로 빌렸는 진 몰라도 아무튼 남의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붙잡혔다.
판사는 사회정의를 지키는 보루다. 사회정의의 보루인 판사가 이런 저질적 반사회성을 저지른 예 또한 일찍이 없었다.
삼복 중이라 날씨가 푹푹 찐다. 음식이 잘못되어 쉬듯이 사람도 잘못되어 쉬는 지 맛이 간 이런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슬프다 못해 웃긴다.
개가 사람을 문 것은 뉴스가 아니라고 했다. 견습기자 시절에 들은 선배들 말이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게 뉴스’라고 했다. 만취된 뺑소니 검사나 술마시고 남의 차를 훔친 도둑 판사 같은 뉴스는 사람이 개를 문 것과 같은 진문이면서도 추문이다.
하필이면 판·검사들인가 싶어 애꿎게 더운 날씨를 탓하기도 한다. 날씨 탓이 아니라 술탓이거나 두 가지가 겹쳤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다 아니다.
지금의 지법 원장이나 지검 검사장급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이니까 참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무렵 법조를 출입하던 때 기묘한 사건에 부딪혔다.
초임의 총각 검사가 하숙집에 틀어박혀만 있기가 무료하여 밤에 거리로 나온 게 요즘같은 여름철이었다. 마침 길에 멈춰서서 서성거리는 젊은 여자가 총각 검사의 눈에 이성으로 비친 것은 자작해 마신 소주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를 스쳐 지나 가다가 손목을 잡은 것이 공교롭게 남편에게 들켜 화근이 됐다. 그 여성은 택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렸던 것이다. 총각 검사는 파출소까지 가 이내 나오긴 했으나 문제는 뒷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정보는 경찰에서 흘리게 마련이어서 검찰의 보안 조치는 허사가 됐다. 기자실을 찾은 검사장은 재치가 있었다. 만약에 구구한 변명을 늘어 놨으면 영락없이 기사화 됐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출세해 보겠다고 고생끝에 모처럼 고시에 합격한 한 젊은이의 장래를 죽이겠소, 살려주겠소?”하는 말에 그만 더 들을 것도 없이 안들었던 일로 치워버렸다.
다같이 술마시고 저지른 판·검사의 실수지만, 총각 검사의 성희롱에 비해 뺑소니나 차량 절취는 사안의 질이 판이하다. 그땐 성희롱의 법률적 개념이 정립안됐을 때인데도 기속력이 있었던 것은 윤리성을 요구받는 직분 때문이었고, 그같은 윤리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판사·검사의 일은 법률 적용이지만, 이를 해석하는 자유심증주의 잣대는 법률이 아닌 양심이다”라는 말은 법조 출입 당시 재조 원로들에게 많이 들었고 또 본 바가 있어 영원한 법언이라고 믿는다. 수양에 의해 달관된 인생관을 가진 판·검사가 고심을 갖고 사건을 보는 눈과 거품에만 들떠 기계적으로 안일하게 사건을 보는 눈의 차이가 엄청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다.
피의자가 취조를 받을 때 검사가 커보이고, 피고인이 재판을 받을 때 판사가 커보이는 것은 직분의 권능 때문이다.
그런데 비틀대는 주인공들을 두고 이런 말이 있다. “판·검사도 수가 많다보니 별 것 들이 다 있는 것 같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독재정권에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검사, 군사정부 권총 부리에도 위협을 두려워 하지 않은 판사 등 대쪽 같았던 선배들이 전에는 많았다.
물론 판사·검사도 사생활이 있다. 술도 즐긴다. 그러나 아무리 술에 취해 실수를 해도 사회통념의 한계가 있다.
윤리성을 심히 일탈해 법률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서는 맛이 가도 완전히 갔다. 비틀거리는 판·검사가 더이상 법률 적용을 검토하는 지위에 있는 것은 더욱 슬픈 코미디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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