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낙선재의 비극

조선조 이왕가(李王家)의 세손 이구(李玖)씨의 부음을 들으니, 어머니되는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생각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가 생각난다. 창덕궁은 창건 당시엔 이궁(離宮)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景福宮)이 소실되고는 정궁(正宮)으로 쓰였다. 선조(宣祖) 이후 300여년의 역대 임금이 여기서 정사를 보았다.

고종(高宗) 30년(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이 된 이왕가 마지막 왕세자빈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英親王)으로 불렸던 대한제국 최후의 왕세자 이은(李垠) 공을 사별하고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낸 것은 우연치고는 기구했다. 국상을 당한 역대 왕후가 상중에 소복으로 은거하던 곳이 낙선재였다. 이 때문에 조경은 오밀조밀하게 조화를 이루었으면서도 화려함은 절제됐다. 고주택 풍의 연속된 건물 세 채엔 단청이 되지 않았다. 후원은 숲으로 우거졌다.

행랑 남쪽에 있는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맞은 편에 ‘ㄱ’자형의 낙선재가 보인다. 이방자 여사를 찾아뵜을 때가 1986년 초로 기억한다. 무늬없는 단아한 옥색 치마 저고리 차림이었던 전하(殿下)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시종(侍從) 일을 보는 낙선재 사람들은 모두 “전하”라고 했다. 이방자 여사는 그 때 어려운 여건 속에 정박아 교육과 함께 지체부자유자들에 대한 기술교육을 위해 ‘명휘원’을 세워 정성을 쏟던 참이었다. ‘명휘’(明暉)는 남편 이은 공의 아호다. 기사 취재길엔 가수 조용필 조영남씨가 동행했다. 조용필씨 팬이라면서 특히 ‘한 오백년’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중에 조용필씨는 ‘명휘원’을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건강해 보이던 분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이다.

일본의 왕족이었던 이방자 여사의 원래 이름은 마사코(方子)다. 일본왕실의 정략결혼으로 이은 공에게 시집왔다. 당초엔 지금 일본 국왕인 아키히토의 아버지되는 히로히토와 정혼한 사이였다. 히로히토가 세자였을 적에 일본 학습원에서 왕비 수업을 받던 중 갑자기 이은 공과 결혼하게 됐다. 이은 공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가 있었던 때였다. 히로히토는 마사코 동생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작고한 이구씨와 일본 아키히토 국왕과는 이종 사촌간이 된다.

그러나 이방자 여사는 철저한 한국인이었다. 비록 시작은 부부가 다 정략결혼의 제물이었지만 살면서 싹튼 부부애는 남달랐다. 이 분들이 살면서 일군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부부가 살면선 막상 까먹는 사랑과는 비할 수 없이 숭고했다. 고초도 많았다. 시집 나라 땅을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밟은 게 1922년이다. 첫 아들 진(晋)을 안고 왔다. 그러나 비극이 기다렸다. 생후 7개월 된 갓난 아기가 갑자기 원인 모를 청록색 젖을 토하며 죽었다. 독살설이 있었다. 일본의 권부(權府)에서 망국의 왕가지만 대(代)를 끊기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말이 그 무렵에 나돌았다.

이구씨가 태어난 것은 훨씬 뒤인 1931년이다. 광복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왕가 왕실을 박대했다. 권력 게임의 도전이 있을 것을 우려해서 그랬다는 항설이 있었지만 믿긴 어렵다. 아무튼 철저히 박대하여 이은 공과 이방자 여사 부부는 일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귀국한 것은 1963년 박정희 정권 때다. 그러나 이은 공은 이미 병이 깊어 김포공항에서 들것으로 옮겨야 할 만큼 반신불수의 몸이었다. 또 건축가였던 외아들 이구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미국 여인과의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는 등 아내와 어머니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모습을 보며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이왕가 마지막 세자빈의 품위를 지키려고 힘썼던 분이 이방자 여사다. 이 분들은 일본 왕실과 철저히 담을 쌓고 평생을 보냈다. 일본 도쿄 아카스카 프린스 호텔에서 갑자기 별세한 이구씨 역시 일본 국왕과 외가로 따지면 남남이 아닌데도 서로가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이제 낙선재가 마지막 주인을 보낸다. 이은 공에 이어 이방자 여사가 가고, 오는 24일엔 그 분들의 외아들 이구씨가 낙선재에서 떠난다. 조선조 이왕가의 적통(嫡統)은 이로써 끊어졌다.

그날, 이방자 여사는 주로 사회사업 얘길 많이 했다. 그런 가운데 무슨 말 끝에 단 한마디했던 말이 생각난다. “힘 있는 나라가 돼야 하니까요…” 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에 떠오른다. 낙선재의 비극은 결코 지난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미래를 일깨우는 시대적 되새김의 함축성이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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