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盧 ‘연정의 노래’

대통령의 다변증이 또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엔 좀 이상하다. ‘연정’(聯政)을 노래한다. 가수 현철씨가 부른 ‘봉선화 연정’(戀情)도 아니고 도시 아리송하다. 하긴 聯政과 戀情은 상통되는 점이 있긴 있다. 정치적 연애(戀愛)가 聯政이기 때문이다. 정치판 연애엔 보기 좋은 것도 있고 보기 추한 것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타령은 주변의 전주곡에 이어 노래가 이제 본격화됐다. 가사는 “연정을 비난만 말고 여러가지 가능성을 놓고 건설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으로 나왔다. ‘한국정치,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제목이 붙었다. 대통령은 예컨대 경제 문제에 야당을 탓한다. 부동산 문제도 야당을 탓한다. 그러나 민중의 기억으로는 이런 것들은 여소야대와 아무관계가 없다. 경제는 설비투자의 위축을 가져온 반기업 정서 조장이 결국 악화를 가져왔다. 부동산은 반시장적 무리 수가 걷잡기 어려운 거품을 부풀렸다.

오히려 이 정권에 무기력하게 끌려온 것이 야당이다. 예를 든다. ‘신행정수도법’을 손 들어준 게 명색이 제1야당이라는 한나라당이다. 이 법이 위헌 결정이 나자 대체법으로 만든 ‘행정도시법’ 역시 손 들어준 것도 한나라당이다. 공공기관 176개를 대통령 생각 하나로 옮기는 무지막지한 처사에 뒷짐만 지고 있는 것도 한나라당이다. 첨단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으로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데도, 이 정권의 정치논리에 가위 눌려 쪽을 못쓰는 것도 한나라당이다.

제17대 국회가 처음부터 여소야대인 것은 아니다. 총선은 여대야소를 만들어 주었다. 여소야대가 된 것은 선거에 법을 어겨 당선된 여당의 가짜 의원들이 많아 의원직 상실이 잇따르면서 시작됐다. 결정적인 것은 4·30 재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0 대 6으로 단 1석도 건지 지 못한 완패에 있다. 노 정권의 실정에 대한 민중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이래서 비록 여소야대가 되긴 했으나, 대통령 사람이던 조대현 헌재 재판관 후보도 통과됐다. 뜬금없는 여소야대를 빙자한 연정 타령은 그간의 실정 책임을 정치권에 떠넘기려는 술수다. 국회에서 한 두번 제기되어 그것도 불발되기도한 장관 해임건의 문제로 대통령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하는 건 예의 엄살 9단 정략이다.

올 성장률 목표치는 5%에서 4%로 내리더니 이젠 3%선으로 주저앉았다. 40만개를 창출할 것이라는 일자리를 30만개로 줄였지만 이도 될성싶지 않다. 민생의 어려움이 말이 아니다. 먹고 살 얘기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길 바라는 것이 민중의 기대다. 그런데 엉뚱한 연정 타령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석자리 반이라고 했는 데 메들리로 나온다.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에 부처의 국장급 실무까지 직접 챙겼다. 이런 대통령이 ‘경제민생점검회의’ 주재를 총리에게 넘겼다. 경제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던 연초의 다짐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회의를 주재해도 돌아가는 것은 민중의 원성이고 보니, 총리를 방패 막이로 삼는 걸로 비친다. 이해찬 총리가 실세총리인 덴 연유가 있다. 대통령을 옹위하는 충실한 악역총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한국정치가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연정을 하고, 물리적 정치권 개편을 강행해야만이 정상화되는 건 아니다. 여소야대가 비정상인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비정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정치가 비정상으로 가고 있다. 정치권 개편의 전망이 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학적 융합의 순기능이 아닌 물리적 작용의 역기능은 야바위다. 이 정권에서 거국내각을 한다하여 연정에 입각할 야당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내각이 정권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실정의 책임을 뒤늦게 바가지로 뒤집어 쓸 야당이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긴 하나 ‘알파’는 있다. 이래서 겸사 겸사한 ‘연정의 노래’는 모종의 개헌 논의를 조기에 불지피려는 간접 의도일 수 있다. 하여튼 쑤석거리는 덴 도가 텄다.

이 정권의 민중은 정말 피곤하다. 탈도 많고, 이유도 많고, 말도 많은 술수에 지쳤다. 돌멩이를 실험삼아 연못에 던질 지라도, 돌멩이에 맞는 민중의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다. 정치판의 화두를 바꾼다고 민심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칼럼란은 원래 사람사는 좋은 얘기를 하고싶어 시작했다. 그랬던 게 정치 얘기가 단골이 됐다. 좋든 싫든 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피하려 했는 데, 오늘도 추한 정치 얘길 또 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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