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종 칼럼/남자 여자 따로 잘노는 방법

접대문화가 술에서 골프, 공연관람 등으로 바뀌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강남을 비롯, 전국적으로 룸살롱이 성업중이다. 밀실을 선호하는 남자들의 문화는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룸살롱에서 쾌락과 퇴폐의 도를 넘기고 있다.

왜 우리나라에만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룸살롱과 같은 ‘밀실문화’가 성행하고 있을까. 혹자는 한국남성이 유난히 심한 사회적 압박강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건 문제의 본질과 먼 해석이다. 엉뚱한 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룸살롱 창궐의 주범은 주거공간의 급격한 변화에 있다. 전통사회의 한국형 주택구조에는 남자들만의 공간인 ‘사랑방’이 있었다. ‘사랑방’은 전통사회가 주는 도덕적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남자들이 만든 자신들만의 일탈 공간이다. 아내의 전용공간인 ‘안채’와 적당히 떨어진 사랑채는 응접공간이면서도 남자들만의 내밀한 밀실지향형 공간이다.

어린시절 전통가옥에서 자란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여흥을 즐겼다. 적당하게 안채와 격리된 사랑채에서 아버지와 친지들은 당신들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이따금 음담패설도 오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안상을 들고 들락거리는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시선속의 적당히 통제된 일탈행위다. 짓궂은 아버지의 친구들에 의해 치맛자락을 붙들린 어머니의 노랫가락도 들려왔지만 사랑방은 언제나 건강한 유머와 흥겨움을 잃지 않던 공간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통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주거공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사랑채는 이제 박물화된 고옥(古屋)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아파트는 남자들에게 ‘사랑방문화’를 빼앗아갔다. 집 전체가 가족구성원의 공동공간이나 다를 바 없는 가옥구조에서 밀실 지향형 남자들이 갈 데 없어진 것은 당연하다. 아내의 허락 없이 친구를 아파트로 초대한다는 것은 간 큰 남자시리즈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사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남자들이 자신들만의 ‘진화된 의미의 사랑방’을 찾아낸 것이 룸살롱이다. 이 현대적 의미의 남자들만의 밀실공간은 익명성까지 보장해줄 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의 시선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오늘날 통제 불능의 ‘개’같이 노는 일탈 문화가 룸살롱 문화의 고유명사처럼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남자들과 달리 전통사회에서 여자들의 건전한 일탈공간은 빨래터다. 빨래터에서 여자들은 자신들만의 억압적 일상을 보상받으려고 애쓴다. 삶의 회한과 거침없는 남녀관계의 속내가 오갈뿐만 아니라 은근한 음담패설도 교환되는 장소다. 그러나 빨래터는 속성상 동네 총각들과 남정네들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 아니다.

남정네들의 시선으로부터 적당히 통제된 일탈 장소가 바로 빨래터인 셈이다. 이 빨래터 또한 급격한 도시화로 사라져 버렸고 예나 지금이나 물가를 좋아하는 여자들의 속성은 도시 곳곳에 현대판 빨래터인 ‘찜질방 문화’를 만들어 냈다. 동네 남자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사라진 익명성의 찜질방 문화가 건전하게 정착될 리 만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불건전한 일탈문화가 사회 건강성의 상징인 가족중심의 공동체 문화를 앗아가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원인을 알면 해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아파트와 같은 대형 공동주택을 지을 때 동별로 서울 도곡동의 ‘타워 팰리스’처럼 ‘공동 파티 공간’과 ‘사우나탕(찜질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다시 주거문화를 전통주거로 바꾸거나 우물가가 있는 농경사회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채’와 ‘빨래터’의 건강한 사회 기능을 새로운 주거 개념에 도입해 놀게 해주는 일도 아이디어가 아닐까. 가족이 ‘막’ 놀지 않고 절제하며 노는 문화를 위해 제안해 본다.

/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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