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가 최근 한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내게 메일을 보내 왔다.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문제인 것 같아 소개한다.
한 친구가 ‘5월은 괴로운 달’이라고 말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등 돈 들어갈 일이 많아 월급생활에서 꼭 적자가 나는 달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결혼 기념일까지 끼었으니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일 년 중 5월이 가장 싫다고 했다.
모두들 그의 말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는데 한 친구가 그래도 5월은 가치가 있다고 반박했다.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 그 동안 잊고 있던 가족의 의미를 그런 기념일을 통해서나마 되새겨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어린이 날이나 어버이 날 마저 없다면 지금 같은 불경기에, 그리고 지금 같이 바쁘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아마 가장들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여기저기서 “옳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반전되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또 다른 친구가 푸념을 늘어 놓았다. “그래,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자네 말은 백번 옳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현실 속의 우리 아이들은 5월이 돼도 그 5월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좌중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계속된 그의 이야기는 요약하면 이런 것이었다.
그는 분당 신도시에 살고 있었다. 자식 교육열이 높은 그는 그 지역의 고교입학제도가 추첨제가 아닌 시험제여서 아들을 명문 고교에 입학 시킨다는 일념으로 출퇴근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분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분당지역의 고교입시제도 역시 추첨제로 바뀌자 그는 집을 팔고 명문 학원이 밀집해 있다는 서울 대치동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지 불과 1년 만에 아파트값이 두 배 가깝게 폭등, 이제는 다시 집을 살 수 없는 형편이 됐지만 아들 교육을 생각하면 그래도 견딜 만했다.
그런데 지난 해 말 2008년 대학입시가 내신 위주로 바뀐다는 뉴스에 그 친구의 분노는 폭발했다. 학교 내신성적이 1등급이 안되면 명문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됐는데 이제 대치동으로 이사 온 게 다 헛수고가 됐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격의 급상승으로 이젠 집 장만의 희망마저 잃게 되고 아들의 교육문제도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됐으니 허탈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의 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은 5월 가정의 달에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는 생각에서다. 그것은 어쩜 우리 40대 아버지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교육당국은 얼마 전 고1생들의 촛불시위가 단지 300여 명만이 모인 가운데 싱겁게 끝나 안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니다.
내신 중심의 2008년도 대학 입시제도가 지금 청소년들을 얼마나 각박하게 몰아대고 있는가. 그들에게 고교 생활은 많은 시간을 운동과 독서와 자신의 특기계발에 쏟아야 할 시기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건강을 해칠 수 있고, 부족한 독서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없으며, 미래의 자기 꿈을 실현하는 데 특기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내신 위주의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는 이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은 물론 가족들의 여가시간 마저도 앗아 갔고, 학급 분위기도 살벌하게 만들어 버렸다. 성적부담을 이기지 못한 우수학생들의 자살이 줄을 잇는 상황이다.
이번엔 대학까지 나서 논술, 구술고사를 강화하겠다고 하니, 말이 입시전형의 다양화이지 수험생들에겐 이중, 삼중의 부담이 될 것이 뻔하다. 학부모들 사이에선 지난해까지 영어 수학에만 주력했지만 이제는 국어 과학 사회 외에도 본고사 대비까지 해야 할 판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과연 공부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부디 바라건대 예전의 우리처럼, 단지 본고사 하나만으로, 아니면 수능 하나만으로 입시를 끝낼 수는 없는가. 그래도 예전 우리 때는 고교시절에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은 있었지 않은가. 학교에서 오자 마자 다시 가방 챙겨 학원에서 학원으로 전전하는 우리의 아이들을 보면서 앞으로 20년 후의 대한민국을 그려 보자. 과연 국가를 발전시킬 창의성과 모험정신, 도전정신이 이런 교육 현실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원 유 철 전 국회의원 (美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