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봄날 죽음에 관한 단상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일요일에 자식들에게 부담주기 싫다는 아버지가 마련한 작은 임야에 형제들이 모이고 산역을 하는 일꾼들이 지관이 정해놓은 가묘(假墓)터에 광중을 파고 봉분을 올릴때 나는 그제서야 겨우 죽음이 나와 연관이 있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죽음이나 장례식은 나와는 무관한 일들이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인생 대부분을 고단하게만 사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신 이제야 마음이 편하다는 말씀을 계속하셔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옛날 어른들은 대문밖이 저승이며 태어난 순서는 있어도 죽는데는 순서가 없다고 경계를 하고, 자녀가 장성하면 사례(四禮)중에 가장 먼저 상장례를 익히게 하여 불시에 대비하였다. 우리가 아는 회갑잔치도 죽음의식이다. 자손들이 술잔을 올려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지만 사실은 부모에게 산제사를 지내는 의례이다. 회갑을 기점으로 논밭에 나가지 않아 한가롭게 생활하며 손자들을 교육하고 윤달을 택하여 장례물품과 유택(幽宅)을 마련하여 죽음에 대비하는 기간을 갖는다.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서는 동료들과 “어쩌면 남의 일 같지 않아” 하고 걱정을 한다. 하지만 내일 아침만 되면 나와는 상관없는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다. 만약 나에게 곧 죽음이 임박해 온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늦게 혼인하여 얻은 어린아이들과 어리숙한 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인생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었는가는 그만두고 주위에 폐만 끼치지 않았는가? 천국이 있다면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기만 한 나를 과연 받아줄 것인가? TV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는 자손과 친우들의 배웅을 받으며 유언을 남기고 엄숙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육체의 기력이 사라지고 병이라도 걸리면 끊임없이 고통이 반복되는데 과연 평화로운 임종이 가능할까?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고 생명을 가진 모든 사물들은 반드시 종말이 있다.

누구나 퇴계선생과 같은 품격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좌선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해탈을 앞두고 열반송을 읊는 스님은 그 순간을 위해서 수십년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동안 잘먹고 잘사는 법이 인구에 회자되었는데 이제는 품위를 지키며 죽는 법을 궁리할 때이다.

/윤 여 빈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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