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박물관 업보

박물관이 낡고 오래된 유물들을 쌓아 놓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지 오래다. 박물관 역사를 보면, 초기에 희귀하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모아들이던 ‘수집의 시대’가 있었고, 시민사회의 등장과 함께 귀족들이 전유하던 미술품들을 시민과 공유하던 ‘전시의 시대’가 그 뒤를 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학교교육을 보충하는 제3의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하는 ‘교육의시대’가 이어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새 세기에는 박물관의 기능이 단순히 고대유물을 수집 보관하고, 전시하거나 세련된 교양교육 등을 담당하는 데에서만 그치지는 않는다. 특히 최근 세계적 추세인 주2, 3일 휴일제 혹은 재택근무등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박물관은 완전히 새로운 변모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박물관은 시민들의 휴식공간 또는 문화창출공간의 새 모습으로 얼굴이 크게 바뀌고 있다. 드디어 박물관에도 업무 뒤 재충전의 휴식시간을 보람있게 보내는 장소로서의 ‘레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낡은 이념 따위는 박물관에 보내져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은 이러한 박물관의 위상변화를 읽지 못하는 무지한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30년이 넘는 박물관 전문가 생활 동안 박물관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 보았다. 개중에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춘 사람들도 있었다. 드물게 상당히 재정적 여유가 있는 경우도 보였다. 체계적이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유물도 수집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박물관을 시작했기 때문에 낭패를 본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겉으로는 아주 매력적으로 혹은 고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상당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다. 낭패겪는 이유야 각양각색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철저한 준비 없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필수요건들이 일찍부터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체계적으로 수집된 유물 둘째, 분수에 맞는 규모의 건물 셋째, 유물을 다룰 전문직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예산을 비롯한 경영여건등이 그에 해당된다. 보통 일반인들의 경우, 유물과 건물만 있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무턱대고 시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실패하기 쉽다. 출발할때에는 꽤 요란하게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소리 소문없이 문을 닫고 수집품이 남에게 넘어간 박물관들도 많다.

여러 요건중에서도 전문직원(큐레이터)은 특히 박물관 진흥법에 명시되어 있어서 비껴갈 수 없는 중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박물관을 운영하기 위한, 아니 경영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기업만이 아니라 박물관도 최고경영자(CEO)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 되었다. ‘박물관 경영’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결국 유물을 살리거나 죽이는 일로 귀결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 건립은 꿈을 키워온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하였듯이, 박물관을 하려면 웬만한 결심만 갖고는 되지 않는다. ‘박물관 업보’라는 말이 있는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서 박물관을 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아무나 무턱대고 덤벼들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사재를 털어가면서 사립박물관을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떤 동기가 작용했던간에 자기 혼자서 그 짐을 다 지려 하면 안된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아야 한다. 이들이 숨은 애국자요, 살아있는 역사지킴이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들이 ‘박물관 업보’를 겪지 않고 나름대로 보람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사회적인 도움이 절실하다.

/이 종 선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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