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이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수원 화산에 행차할 때의 일이다. 임금을 호위하는 기마병 수 백 명이 형형색색의 깃발을 휘날리며 겨울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읍청루란 곳에 다다랐을 때 일순간 기병들이 멈춰 섰다. 갑자기 길이 너무 좁아진데다 얼음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부대가 대열을 갖추더니 순식간에 그곳을 지나갔다. 강나루 앞에서도 다시 한번 대열이 멈춰 섰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강 한 복판을 향해 먼저 달려가는 부대가 있었다. 멀리서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던 백성들의 입에서 “이야! 사람과 말이 마치 나는 것과 같구먼, 신병(神兵)과 다름없네 그려.” “정말 용맹한 부대로세.” 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 부대의 선두에는 ‘장용위’라 쓰인 황색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 정조실록, 1790년 11월 22일 -
정조임금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옮긴 뒤 수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사도세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리 매우 건강하고 총명한 왕자였다. 그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우수한 무예 18가지를 정리하여 ‘무예신보’라는 군사교범서를 펴내 무사들이 익힐 수 있도록 하였고, 효종의 뒤를 이어 북벌을 준비했었다. 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의 첫마디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아버지의 업적을 드러내고 억울한 죽음과 누명을 벗기려 했던 정조임금이 추진했던 일의 하나가 군대를 강화하고 무예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장용영을 창설하고 ‘무예도보통지’를 펴냈다. 장용영 장관 백동수가 출판을 총감독하여 장용영 임시 출판국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에는 사도세자가 정리한 18가지 보병무예에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한 24가지 무예가 실려 있다.
정조임금은 화산으로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했던 1789년에 서울에 있던 장용영 병력의 일부를 수원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후 이 부대를 장용영 외영으로 확대시켰다. 장용영의 군사 훈련은 화성 동장대 ‘연무대’에서 이루어졌고, 정조임금이 화성을 방문했을 때는 동장대에서 친히 군사들을 사열하고 무예를 시험하였다.
지난해 봄부터 초겨울까지 행궁에서는 무예24기공연이 있었고, 매일 새벽마다 연무대 효원공원 장안공원 만석공원에서 수원시민들이 무예24기를 익혔으며, 행궁 옆의 신풍초등학교 체육시간에는 4학년 학생들이 본국검을 수련했다. 이 모든 일은 무예24기가 수원에 뿌리를 둔 역사성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지난 한 해에는 수원시와 경기문화재단, 수원문화원이 한마음으로 무예24기를 경기도 수원의 무예로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예24기는 조선의 국기(國技)였다. 무예24기에 담겨 있는 정신적 교훈과 문화관광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 선다. 사단법인 무예24기보존회 창립총회 때 김용서 수원시장의 축사 중에 “하드웨어인 화성과 소프트웨어인 무예24기가 어우러져”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는 무예24기와 화성 간의 긴밀한 관계와 문화상품으로의 개발 가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드디어 무예24기보존회가 사단법인으로 출범함으로써 무예24기는 수원은 물론 경기도의 자랑,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무예로 성장할 초석을 갖추게 되었다. 앞으로 보존회에서는 보는 사람이나 익히는 사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전통무예가 되도록 힘써 노력할 것이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무예24기를 배울 수 있도록 수련터를 많이 열 것이다. 올 겨울에 ‘쟁이골 무예학교’를 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무예24기를 통해서 모두가 부러워할 수 있는 경기도의 생활문화를 창조하는 일에 많은 분들이 나서 주면 좋겠다.
/김 영 호 무예24기보존회 사무총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