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영화제 품에 안았다
0%에 육박하는 자국영화 점유율,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의 초대박, 세계 3대 영화제의 잇따른 석권 등 올해 한국 영화계는 적어도 외형적으로 국내외에서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해외 수출 총액도 상반기에 이미 지난해 2천500만 달러(약270억원)를 넘어섰다.
하지만, 부쩍 커진 체격에 비해 내실이 없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저예산 제작, 소규모 상영관의 ‘작은 영화’들은 여전히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작품들의 ‘대박’ 이후 한해 내내 뚜렷한 화제작이 없었다는 점은 호황 속의 불황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관객 1천만명 시대 ‘빛과 그늘’=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잇따라 전국 1천만명을 돌파하는 등 상반기 호황을 바탕으로 한국 영화의 올 한해 시장 점유율은 58%(IM픽처스 추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1천만명 이상을 동원한 ‘큰 물고기’ 두 편이 휩쓸고 간 한국 영화계는 그다지 뚜렷한 화제작 없이 1년을 보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관객 100만명을 넘은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102만명) 한 편 뿐이었으며 ‘어린 신부’(서울 88만명), ‘내 머리속의 지우개’(79만명), ‘범죄의 재구성’(78만명), ‘아라한 장풍대작전’(76만 명), ‘귀신이 산다’(75만명),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67만명), ‘효자동 이발사’(66만명), ‘우리형’(66만명), ‘바람의 파이터’(64만명), ‘늑대의 유혹’(61만) 등 ‘중박’규모의 히트작이 이어졌다.
▲해외에서 높아지는 한국 영화 위상= 올해 한국 영화계는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베를린과 베니스, 칸 영화제에서 잇따라 주요 부문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김기덕 감독은 ‘사마리아’와 ‘빈 집’으로 각각 베를린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올드보이’(박찬욱)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또 최고 권위의 애니메이션 축제인 안시 페스티벌에서도 한국 작품 ‘오세암’(성백엽)이 대상을 차지했다. 영화제를 통해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한편 해외 마켓에서도 호조를 띠며 상반기에 이미 3천250만 달러의 해외판매 수익을 거둬들여 올 한해 수출 총액 400만 달러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TV 드라마에서부터 불어닥친 한류 열풍은 일본내에서 배용준, 이병헌, 최지우 같은 스타를 탄생시켰고 ‘태극기 휘날리며’(약 90만명),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약 70만명), ‘실미도’(약 50만명) 등의 히트작을 낳으며 한국 영화의 몸값을 올려놓고 있다.
▲실존인물 소재 영화 제작 붐= 연초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등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충무로는 실존 인물과 과거의 역사에 눈을 돌렸고 이는 올해 전체를 감도는 가장 뚜렷한 제작 경향이었다.
안중근 의사(도마 안중근), 극진 가라테의 고수 최영의(바람의 파이터), 프로레슬러 역도산(역도산), 원년 프로야구의 ‘패전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슈퍼스타 감사용) 등이 스크린을 통해 다시 태어난 실존 인물들이지만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한 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드디어 ‘사랑’에 눈을 떴다.
23일 개봉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성 라퓨타’ 등으로 40년 애니메이션 인생을 꽉 채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이 작품은 지금까지 그의 애니메이션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 서 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과 평화’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젠 ‘너’를 지키고 싶다는 사랑의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 18살의 소녀 소피는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다가 우연히 꽃미남 마법사 하울을 만난다.
그러나 소피는 그와 함께 한 잠깐의 공중 데이트 때문에 마녀의 마법에 걸리고 쭈글쭈글한 90살의 할머니가 된다.
집을 나온 소피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청소부로 들어간다. 밤마다 상처입은 몸으로 들어오는 하울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키워나가던 소피. 그러던 중 매일 벌어지는 전쟁에 지쳐버린 하울을 위로해주고 하울 대신 국왕을 만나러 간다.
감독이 그려낸 환상의 세계는 여전히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넘어선다. 집과 철근으로 만든 ‘움직이는 성’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자 지친 몸을 달래주고 외로운 사람들을 모두 받아주는 아지트 역할을 해낸다.
불꽃 악마 ‘캘시퍼’와 외발로 통통 뛰어다니는 무대가리 허수아비, 어수룩한 변신을 즐기는 제자 ‘마르클’, 철없는 악마 ‘황야의 마녀’ 등 톡톡 튀는 조연들의 연기도 영화의 완성도에 한 몫을 단단히 한다.
꽃미남 마법사 하울과 할머니가 된 소피, 가장 환상적인 이 둘의 캐릭터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커다란 새로 변신해 잔인하게 적을 해치우는 파괴력을 가진 마법사지만 머리카락 색깔 하나에 하늘이 무너질 듯이 괴로워하는 중증 왕자병 환자인 하울. 동시에 소피의 잠든 모습을 훔쳐보는 로맨틱함을 간직한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소피는 젊은이의 열정과 할머니의 지혜로움을 모두 갖고 있다. 60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상상력을 갖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가 되니 잃을 것이 없어 좋다’거나 ‘이렇게 마음이 평화로운 적이 없다’는 소피의 말에서 ‘나이 듦’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 마음가짐에 따라 30대, 40대 또는 10대로 돌아가는 소피의 얼굴에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이 둘의 사랑은 따뜻하다. 하울과 소피가 하늘로 훌쩍 날아오른 뒤 하늘을 두발로 걸어다니는 장면에는 비행기 같은 기계의 힘 없이 오직 서로의 팔에 의지해 중력을 거스르는,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하야오 감독 작품 최초의 키스신도 볼 수 있다. ‘키스신’보다는 ‘뽀뽀신’에 가깝지만 둘의 사랑을 그려내기에는 충분했다.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 관심에서 호감으로, 호감에서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단계가 조금은 서툴러 보인다.
감독의 다음 작품이 어떤 것이 될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이 작품으로 그의 애니메이션 세계에 방점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마법을 걸어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도, 그 마법을 푸는 것도 결국은 ‘사랑’이니까 말이다. 상영시간 119분. 전체관람가.
■서바이빙 크리스마스
오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하는 ‘서바이빙 크리스마스’(Surviving Christmas)는 크리스마스를 혼자서 보낼 위기에 처한 한부자 싱글 남자가 돈으로 ‘크리스마스用’ 가족을 구하는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애인과 피지로 날아갈 꿈에 부풀었던 드루 래덤(벤 애플렉 분)은 애인이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한다”고 딱지를 놓으면서 졸지에 외로움이 사무치는 신세가 된다.
래덤은 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돌연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찾아가고, 현재 그 집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크리스마스를 가족처럼 보내는 조건으로 25만달러(약 2억6천만원)를 제안한다.
삶의 무게에 치여 이혼 위기에 몰렸던 부부는 이 돈으로 잠시 상처를 봉합하기로 하고 연휴동안 래덤의 부모가 되어주기로 한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법. 조금 전까지만해도 능력있고 자신만만한 남자였던 래덤은 엉겨붙을 부모가 생기자 갑자기 유년으로 퇴행한듯, 잇따라 억지스러운 요구를 한다.
불쑥 궁금해졌다. 밴 애플렉은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가족주의를 설파하자는 의도라면 그는 이미 ‘저지걸’에서 가족의 가치를 역설한 바 있다.
애플렉은 이 영화에서 한발 더 나가 몸을 던지며 가족을 부르짖는다. 블록버스터 스타의 변신이가상하다.
그러나 ‘저지걸’ 출연이 감독 케빈 스미스와의 막역한 친분 때문이었고 영화 역시 저예산영화의 미덕을 어느 정도 발휘했던 것에 비해 이번 ‘서바이빙 크리스마스’는 다소 생뚱맞다.
유년과 가족에 대한 상처를 안은 캐릭터라지만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요란스러운 크리스마스 연휴를 홀로 보내야 하는 공포감은 외로운 싱글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소재. 그러나 주인공이 돈이 많아서였을까. 영화가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기 보다는 10여㎝ 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나. “참 아이러니다. 난 돈을 쓰면서 끼어들려는 가족을 버리려들다니…”라는 래덤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 이 영화의 주제는 살갑다.‘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라는 표어가 사무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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