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시작

아내는 나에게 올 겨울에는 좀 가볍고 비옷을 겸할 수 있는 바바리코트를 한 벌 장만하라고 하였는데, 백화점 대신 청계천 세운상가에 가서 그 돈으로 검정색 박사 학위복을 맞추었다. 출신학교를 대니 꽃자주색 후드의 학위복을 보여주었다.

학위수여식 때 입는 학위복은 주로 차분한 검은색 바탕에 간단한 디자인으로 중세 수도사들의 예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2세기경 성당 학교로부터 비롯된 중세 대학에서는 성직자들의 외출복으로 쓰이던 카파 클라우사(Cappa clause)를 교복으로 입었는데 종교개혁 후 엄격했던 생활규범이 변화하여 공식적인 경우에만 입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지 2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지 13년 만에 새삼스럽게 검은색 가운을 장만한 데는 까닭이 있다.

며칠 전에 제자의 석사학위 심사가 끝났는데, 내가 지도한 다섯번째 석사학위이다. 제자들의 학위수여식에는 꼭 참석하여 사진을 찍었었는데, 오랜 노력 끝에 학위를 받는 날 지도교수가 ‘정장’을 하고 가서 축하해 준다면 더 기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석사학위를 받을 때는 은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어 지도교수가 바뀌었고,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교수님을 졸업식장으로 모실 생각도 못하였었다.

검은색 가운을 입어 볼 때 나는 제임스 힐튼의 소설 ‘굳바이 미스터칩스’의 칩핑선생이 검은 가운을 입은 모습이 보이는 것 같으며, 흰 가운을 입고 해부학 실습실에 서 계시던 성기준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학의 학위수여식은 배를 항구에서 바다로 풀어놓는 걸세, 시작이라는 뜻이지…”

영어 ‘commencement’에는 ‘학위수여식’의 뜻 이외에 배의 ‘진수식’, ‘시작’이라는 뜻도 있다.

대학이라는 항구에서 완성된 배들을 바다로 풀어놓는 일, 이것이 학위수여식이며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이번에 학위를 받는 제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나의 은사님께서 내게 일러주셨던 것처럼….

/황 건 인하의대 교수.수필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