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토막. 친구는 90년대 중반, 소규모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면서 대형업체와의 경쟁을 피해 그들이 관심갖지 않는 중소기업용 전산화 프로그램을 개발, 조금씩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정부 산하기관에서 덜컥 중소기업용 전산화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소프트웨어란 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저 한 번 개발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도나 여건이 변화하기도 하고 혁신적인 기술이 생겨나는가 하면 경쟁회사가 보다 우수한 제품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업은 끊임없이 기술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기관에서 용역으로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그런 기술개발이 더디게 마련이다. 지원용으로 보급되었던 그 소프트웨어는 얼마지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도서관의 도서관리 프로그램도 비슷한 형편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한 업체에 맡겨 개발한 도서관전산화 프로그램 KOLAS II를 보급했는데 단 한차례의 성능개선이 있었을 뿐이고 각 도서관의 특수한 형편을 반영하지 못하는 등 개선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확정된 계획은 없는 형편이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각 도서관이 개별적으로 개발업체와 유지보수 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사실상 정부기관이 앞장서서 일개 업체의 독점시장을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사이버중앙도서관에서 개발한 도서관 전산화 프로그램은 훨씬 진보적 개념의 프로그램이지만 감사원 감사에서 중복투자로 지적을 받고 말았다. 결국 경쟁에 의해 보다 빠르게 우수한 성능의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다.
정부의 사업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원인이야 분명하다. 사업의 주체가 장기적인 안목 없이 당장의 성과만을 기대하기 때문이요,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역, 민간영역의 창조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스스로 가치를 판단하고 시행하고 그에 따른 문제는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역과 민간영역의 창조적 가능성을 신뢰할 때만, 그것이 큰 정치적 사안 뿐 아니라 자그마한 사업 하나하나에 반영될 때까지 이르러야만 진정한 분권화가 가능해 지고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회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표신중 기전문화대학 미디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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