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객기인가? 경륜인가?

다 좋다. “대북 봉쇄정책은 불안과 위협을 장기화 할 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무력행사는 협상전략으로서의 유용성이 제약받을 수 밖에 없다”고도 했다. 무력행사 부정, 대북봉쇄 배제를 부시에게 촉구한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연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것이 미국에게 할 말은 한다는 당당한 대미외교용이든, 모험을 건 국제게임용이든, 지지층 결집을 위한 국내 정치용이든 간에 다 좋다.

그러나 이 말은 실언이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일반적으로 북한의 말을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고 한 끝대목은 잘못이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합리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가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을 고쳤다. 대북 비호의 의지를 가늠케 하는 촌극이다. 만일의 경우 예상할 수 있는 미국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동포를 보호하는 것이 잘못이란 건 아니다. 남이든 북이든 한반도 전역이든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알아야할 게 있다. 대통령은 부시에게 강력한 김정일의 대변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북으로부터 무엇을 보장받았느냐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투명성을 위해 공개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공개해야 하지만 일을 위해서 당분간 비밀에 부치겠다면 이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 대신 김정일로부터 아무 보장받은 것 없이 남북정상회담이나 바라는 짝사랑 끝에 한 말이라면 공연한 객기다. 북이 생존 수단으로 삼는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밥상을 차려 대겠으니 먼저 6자회담에 성의있게 나오라는 미국과 그 밥상부터 먼저 보자는 북과의 대치에서 제 역할을 다 해야 하는 것이 노 대통령이다. 이것이 바로 남북 공존공영이고 한·미동맹 관계의 유지인 것이다. 부시 코 앞에서 가진 비위 건들기 로스앤젤레스 연설이 과연 이에 얼마나 합치되는 지가 의문이다.

의문은 또 있다.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제는 북한이 개혁과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관심”이라고 말했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북이 개방·개혁에 나서면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에 긴장이 있을 이유가 없다. 한반도는 그 자체가 곧 평화다.

이런 데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주체사상-수령론-혈통승계-우리식사회주의가 연계고리를 이루는 북의 체제는 개방·개혁이 바로 체제 붕괴다. 김정일이 중국에서 상하이 쇼크를 받은 지가 이태가 넘는다. 그 자신도 개방·개혁을 절실히 느꼈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 우리식만을 계속 고집한다. 인민들은 배고파도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탈북자가 늘어도 국제사회의 창피를 모른 채 외면하는 연유 또한 이에 있다. 주체사상이 오늘의 체제유지를 가져오는 덴 성공했지만, 인권유린과 기아선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승자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평양정권의 고민이다.

북이 이런 실정에서 과연 대통령 말대로 개혁과 시장경제를 할 것인지는 역시 미지수다. 만약 이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면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희망사항이라면 대통령다운 경륜이 아니다.

부시는 아직 아무 말이 없다. 백악관과 국무성도 그 흔한 대변인 논평조차 없다. 부시 흔들기에 앞서 한·미 두나라 정부 간에 어느 정도의 물밑 교감이 있었는 지 없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조용하다. 이러한 조용함이 긍정인 지 부정인 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거의 분명한 것은 기존의 대북관계 틀에서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부시는 재선으로 자신의 방법에 더욱 자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날 노무현·부시회담이 주목된다.

/임양은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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