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산책로 단풍나무 잎이 붉게 물든다. 가로수 은행나무 이파리도 곧 노랗게 물들 것이다. 낙엽은 겨울의 전령이다. 좀 있으면 낙엽이 지기 시작한다. 아니 벌써 떨어지는 잎새도 있다. 모든 낙엽엔 저마다 단풍이 들어 있다. 붉거나 노랗지 않다하여 단풍이 아닌건 아니다. 비록 볼품없는 단풍이지만 그래도 단풍은 단풍인 것을. 낙엽은 이래서 쓰레기가 아니다. 자연의 일부다.
낙엽지는 밤 거리를 걷노라니 웬지 한잔 술이 생각난다. 조름이 찌든 조명등 아래서 자작하는 모양새가 청승스러워 보이겠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자아의 실존에 감사할 뿐이다.
문득 타임머신을 탄다. 과거로 간다. 그렇다. ‘다치노미(立ち飮み) 집’은 일제 때 생긴 일본어의 합성어다. 말 그대로 ‘서서 마시는 집’이다 선술집이다. 선술집은 해방이 되고나서도 춘궁기 시절까지 가난의 멍에를 끈질기게 이었다. 텁텁한 막걸리 사발을 요기삼아 “카…” 하며 비우고는 김치 깍두기를 꼭꼭 씹는 입 언저리를 옷소매로 쓱 문질러 닦으면 그것으로 한잔 술이 끝난다. 허리춤 높이로 길게 만든 투박한 상이 볼품은 없어도 인정은 배어 있었다. 위생은 엉망이었겠지만 엉성엉성한 천장이며 벽틈엔 민초의 애환이 서렸다. 타임머신은 갑자기 미래를 향해 달린다. 유리성 같은 집안 꽃 방석에서 송이버섯 술을 마시는 데 밖으로만 투시되는 유리벽 위로 날아오는 자동차 행렬이 자동감응장치로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잘도 난다.
무변광대한 공(空)의 X축 한 위치에서 무한장구한 Y축 시(時)의 한 시점이 교차되는 나의 존재란 강변의 모래알과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대견한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존재의 가치를 서로 지닌다.
‘신(神)은 죽었다’는 니체의 절규는 신의 부정이 아니고 신의 존재를 긍정한 역설일 수가 있다. 니힐리즘, 인식을 거부하는 허무주의는 도피적 사고가 아닌 또 다른 달관으로 해석해 본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증오의 정서를 전수해 놓고 증오하지 말라고 한다. 모순 덩어리인 것이 인간의 매력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인성의 말살이다.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것처럼 더 추한 건 없다.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용기와 인내와 지혜가 있어주기를 간곡히 희구한다. ‘개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다. 좋을 때 좋아서 희희낙락거리는 것은 누구든 다 통한다.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병통이 도지는 것이 인간의 배신이다.
초등학생 때다. 집에서 놀러 나가면 기르는 개가 따라오는 게 귀찮아 돌멩이를 던져 쫓곤했다. 멀찌감치 도망갔다 가도 돌멩이 던진 주인이 뭐가 좋은 지 이내 꼬리를 흔들며 또 뒤따르는 것이었다. 이런 숨바꼭질의 학대에도 배신을 몰랐던 ‘누렁이’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개 꾼에게 팔려간 것을 알고는 얼마나 울었는 지 모른다.
돈 맛이 아주 단조로웠던 과거에 비해 돈 맛이 무척 다양해졌다. 인성이 이러므로 하여 척박해지는 자신이 밉다. 사람이 만든 기계에 사람이 지배당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끊임없는 욕망과 끊임없는 도전의 차이는 무엇인 가를 생각해 본다. 의문만 있고 해답은 없다.
기억할 수 없는 무한한 과거에서 예상할 수 없는 무한한 미래를 제멋대로 여행하는 내 타임머신은 언젠가 모를 종점에서 머문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것일까,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이 기분좋게 취기를 돋운다. 날이 밝으면 누리의 한 모서리에서 뛰어야 하는 삶의 졸개인 데도 이 밤만은 느긋한 나홀로 왕자다. 저 멀리 반짝이는 하늘의 별은 연인의 미소이고 땅위의 낙엽은 나의 분신인 것을.
오오! 신이여 부처여, 인간의 오만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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