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여만이 살고 있는 국제도시 상해는 화려한 곳이었다. 그 화려한 도시 한곳인 상해시 노만구 마당로 306호에 자리잡은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는 초라했다.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 구 시가지인 데다가 너무나 협소에서 작은 승용차 한 대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3층 건물 안에는 당시 김구 주석이 사용하던 집무실, 정부각료 집무실, 5인 숙소 등 모두가 5~6평정도의 작은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 좁은 방에 일 국의 정부차원의 집무실이 있었고 대표의 집무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층을 달리하여 세워진 김구선생의 동상과 그 시절 활동했던 임시정부 각료들의 활동이 담긴 사진들도 초라하게 전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좀더 역사화하고 돈을 들여서라도 성역화 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라를 빼앗긴 후 일본의 압제 밑에서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을 했던 장소가 그토록 초라했으며 또 그렇게 초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하니 나라가 없는 시대의 슬픔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그 시절 임시정부 각료들과 그 각료들을 따르는 많은 애국지사들은 그 초라한 청사에 비하여 엄청난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분들의 활동적 역사를 생각하면서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참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데 그 계승의 뿌리요, 유적지인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의 유적지가 그토록 초라한 채 서있어도 괜찮은가 라는 의구심이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우리는 5000여년이란 긴 역사동안 무려 약 931회나 되는 외침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전쟁 중에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일반 백성들이었다. 적의 칼에 찔러 죽음을 당하고 화살에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어갔다. 그때마다 위정자들과 국민들은 다짐을 했을 것이다. ‘국력을 기르자.’ ‘우리도 힘을 기르자.’ 그러면서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또 국력문제를 잊고 당파싸움에 연연한 것을 보면 무던히도 권력에 매료되었나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외침을 받으면 그 당파싸움에서 승리한 그 정치인도 적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이 그 대표적일 것이다. 또 50년대에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에서는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죄 없이 죽어갔던가? 더구나 그 전쟁에서는 같은 피를 나눈 동족끼리 죽이고 적과 적으로 몰아갔으며 전쟁의 후유증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실정이다.
헌법 전문(前文)에는 ‘민족의 단결’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항구적인 세계평화’ 등등의 내용들이 들어있다. 지금 우리민족의 단결은 어떤가? 기본질서는 또 어떤가? 국민생활은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있는가? 항구적인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각자가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후손으로써 오늘의 조국을 잘 지켜내야 할 막중한 사명감이 국민 모두에게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는 선조들이 목숨 바쳐 지켜오고 전해준 이 나라를 알뜰하게 가꾸고 지켜나가기 위하여 화합과 단결로 생활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임시정부청사 유적지를 역사적으로 정비하고 좀더 확대 정화시켜 우리 국민이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학생들의 체험학습 지역으로 잡아서 나라를 되찾은 선조들의 업적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법통이기 때문이다.
/양 승 본
서원고 교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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