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과일상자

“아빠, 식탁위에 과일상자 좀 열어 봐. 혹시…”

열두시를 넘겨 집에 들어간 아빠에게 남긴 중학생짜리 딸아이의 쪽지 내용이다. 아이의 말대로 상자는 식탁위에 놓여 있었고 여기저기 뜯으려한 흔적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법 큼직한 상자는 테이프 등으로 꽁꽁 묶여 있었고 과일상자의 모습이었으나 무게는 꽤 나갔다. 아마도 집사람과 아이는 상자의 모양과 무게에서 수상한 느낌을 받았나보다. 일반 사과상자보다는 작고 복숭아 상자보다는 키가 컸다. 무게는 여느 과일이 주는 무게감과는 사뭇 달랐다. 또한 배달 직후에 없어진 것인지 보낸이의 인적사항이 찢겨져 있었다.

대충 이 정도니 우리 식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배달된 낯선 상자로부터 뿜어 나오는 미스테리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빨리 아빠가 들어와 그 상자를 개봉을 해서 미스테리를 풀어 줬으면 했지만 기다리는 아빠는 그날따라 무척 늦은 것이다.

또한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모 광역시장 집으로 배달된 굴비상자가 생각났던 게다. 지난 설 명절때 만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우리집에서 벌어진 것이다. 방송인에서 정치인으로 바뀐 상황이 나 자신뿐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쯤에서 상자의 비밀을 말하자면 내용물은 달덩이만한 멜런 세 덩이였고 친한 선배의원께서 후배 초선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씀과 함께 보내준 추석 선물이었다. 우린 그저 웃을 수 밖에…. 글쎄 그저 웃어 넘기기에도 뭔가 무거운 느낌이 남는다.

요즘 여의도는 경기가 말이 아니다. 쉬운 얘기로 밥 한 번 제대로 사는 선배의원이 별로 없다. 어느 대선배 의원은 나와의 첫 만남에서 “한 의원, 와 이제 왔노? 재미 되게 없을 때 왔네.” 여러 가지로 옛날이 좋았다는 뜻 일게다.

국회의원 당선되고 나에게 들어온 후원금은 지역의 이름모를 주민으로부터 입금된 5만원이 전부다. 물론 선거기간에 후원금이 얼마간 들어 왔으나 이미 바닥난 상태. 소위 방송할 때 벌어 놓은 돈 까먹고 있다. 선배들에게 손 내밀기도 면구스럽다. 그들도 사업 안돼 죽을 맛일테니.

9월초에는 지역 사무실도 폐쇄했다. 선배의원들은 무척이나 걱정을 해준다. 하지만 비록 내가 새내기이지만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저비용 정치에 대한 실험인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 만나 얘기할 때 밥값정도는 필요하긴 하다.

그래도 내용 바뀐 과일상자는 사양이다. “딸아, 걱정 말아라.”

/한선교 국회의원(용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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