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신기남 의장에게

당신이 신상묵 선생의 아들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뭐라 할까요… 아무튼 반가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친되는 분을 존경했던 사람으로서 그 분이 애국지사들을 고문까지 한 일본 겐페이(헌병) 고초(伍長) 출신인 사실을 이번 신문보도를 통해 알게된 것 또한 당혹스럽기도 하고요. 신 의장의 선친과 저의 선친은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신 의장 선친을 가끔 뵐 수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앞서 신 의장 선친이 장성경찰서장으로 계실 때부터 제 선친과 익히 알았다는 것이 저의 정확한 기억입니다.

신 의장의 선친이 제게 가장 인상깊게 남는 것은 중학생 시절의 일로 생각합니다. 제 선친에게 온 편지에 “이제 지리산에도 평화가 올 날이 머지 않습니다….

그동안 희생된 수많은 동지들을 생각하면 열루가 앞을 가릴 뿐입니다”라는 대목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편지가 엽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대목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지리산 반란군(그땐 그렇게 불렀지요)들 보급투쟁 바람에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던 사회위기를 당시 생생히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선친도 나중에 경찰에 투신하였지만 좀더 일찍 경찰에 몸담았거나 2년걸린 지리산 평정이 조금만 더 지연됐더라면 아마 신 의장 선친이 사령관으로 계셨던 ‘서남지구전투사령부’ 휘하에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지금 신 의장 선친이 일제시대 일로 참 딱하게 됐지만 한국전쟁 중 후방치안을 위해 목숨 내놓아가며 진두지휘 하셨던 혁혁한 공로는 시게마쓰 구니오(重光國雄) 겐페이와는 달리 부인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달라져 이젠 화해하는 분위기로 ‘남부군’이다 뭐다하여 더러 미화하기도 하지만 그 무렵 남로당 이현상 총사의 유격대(반란군)는 습격·납치·방화 등 참으로 많은 양민을 살상했습니다. 이념 갈등이 가져온 실로 비극의 시대상이었습니다.

신 의장이 신상묵 선생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 왜 진보주의 정치인이 됐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는 신군부에 대한 5·18 항쟁의 강한 민주화 의식이 개혁사상을 갖게된 게 아닌가 판단하고 또 굳이 부정적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저 자신도 자유당 정권 때 한동안 사회주의에 심취해 ‘진보당’ 사무실을 들락거리길 좋아 했으니까요.

문제는 이 정권의 과거사 규명 정략에 주축을 이루는 친일 청산에서 신 의장 선친이 견본(見本)으로 오르게 된데 있습니다. ‘보아라! 우리당 대표 아버지도 친일 청산의 도마위에 올렸다. 하물며 다른당 대표의 아버지쯤이야…!’하는 과시는 고인을 제물화하는 게 아닐까요.

국영방송이라 할 KBS 전파에서 바로 신 의장 선친이 소탕에 나서 궤멸된 지리산 반란군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전사하련다…”는 북의 혁명가가 울려 퍼지는 세상 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진보주의나 개혁이 이런 것은 아니잖습니까.

자기 아버지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랑삼는 북의 체제처럼 이승에 없는 자기당 대표 남의당 대표를 친일 청산의 도마위에 올려 난도질해서 도대체 얻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부끄러운 역사라고 역사에서 잘라낼 수 없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래도 민족정기를 내세워 해야 한다면 좋습니다. 일제시 허물은 허물대로 가리고, 건국후 공로는 공로대로 평가하겠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건국후의 일은 제쳐두고 친일행위만 따진다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이런 작업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저희 어제 신문에 난 ‘과거사는 학계, 정치권은 미래사 힘쓰라’는 제하의 사설로 대신합니다. 개혁은 화합으로 가는 고통 분담의 변화이지, 저주로 가는 본질적 혁명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신 의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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