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28일까지 ‘수원화성국제연극제’가 열린다. 정조가 백성을 위하여 위민정책(爲民政策)과 통합정책(統合政策)을 펼친 문예부흥의 군주라는 사실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특히 그가 어떤 사상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개혁 사상을 어떻게 관철하고자 하였는지 살펴보자. 21세기를 개척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찾아야 할 지금 정조의 위민정책과 통합정책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위민정책은 크게 7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인사정책은 ‘의리의 탕평책(蕩平策)’이다. 붕당의 명분과 개인의 명예를 존중해 줄때 비로소 지식인계층의 국정참여가 가능해진다. 소수의 독점계층이 주요 권력기구를 장악하지 못하게 하였다.
둘째, 경제정책은 특권타파를 추구하여 난전 활성화정책(亂廛活性化政策)을 폈다. 비단·무명·명주·종이·모시·어물을 팔던 육주비전(六注比廛)의 상품이 아닌것도 자율화와 개방화를 허용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서로 통하게(通共)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려는 조치다.
셋째, 사법정책은 형률완화정책으로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추진한다. 형벌의 남용을 막고 악형에 의한 백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줄여주고자 한 것이다. 옥리에게 명하여 5일에 한번씩 감옥을 점검, 청소하고 형구를 세척하게 했다.
넷째, 종교정책은 포용정책을 펼친다. 정조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은 다양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실학뿐만 아니라 양명학·도교·불교·서학 등 ‘이단적’ 사유체제에 대해 개방성을 보인다. 이는 실효성을 강조한 정치관에 뿌리를 둔다.
다섯째, 복지정책은 자휼전칙(字恤典則)에 근본한 아동구휼정책이다. 흉년을 당하여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버림받아 굶주리면 부모나 친척 등 의지할 곳을 찾을 때까지 구휼하였다.
여섯째, 인권정책으로 평등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서얼허통정책(庶孼許通政策)과 노비제도개혁을 펼친다. 단지 서자와 노비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적·사회적 활동에 배척당하는 현실을 혁파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정책이다. 중국에서 최고의 문화대국이라고 생각해온 명나라가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대격변기이다. 사상적·문화적으로 중국보다 건강한 성리학 체제를 건설하자는 조선중화주의를 제기하였다.
역사학자 E.H.카아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우리는 과연 정조의 위민정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송기출 수원청소년문화센터 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