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장애우 정책의 변화를 기대하며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장애자, 장애인을 거쳐 요즘은 ‘장애우’라는 호칭을 쓴다. 단순히 장애를 가진 자라는 뜻에서 우리의 자연스런 이웃이라는 표현이 정감이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관심인 것이다.

17대 국회의 특별한 모습은 장애우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장향숙 의원, 한나라당의 정화원 의원.

언젠가 의원 휴게소에 앉아 있는데 나와 같은 당의 정화원 의원이 곁에 와 앉았다. 그는 선천적 장애인이 아니라 녹내장이 심해져 19세때 실명을 했다고 설명을 했다. ‘요즘 같으면 실명까지 가지 않았을 텐데’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제까지 비장애인보다 더 커다란 삶의 의지로 살아온 정 의원에게는 불필요한 인사치레였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나는 화제를 옮겼다. 늘 정 의원 곁에서 보좌를 하는 비서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정 의원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얘기 많이 들었지요?” 그의 대답에 나는 다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껴야 했다. “제가 의원님 아들입니다.”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내 주변에서 늘 만나고 볼 수 있었던 정 의원이었고 그곁에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있었던 비서가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무관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함을 보태서 정 의원에게 말했다. “의원님,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지요. 아드님이 꼭 의원님 닮았어요.”

나에게는 변호사 일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불행하게도 그 친구는 정신 지체 중증 장애를 가진 딸을 키우고 있다. 제 나이라면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할 정도이지만 그 아이의 정신 연령은 서너살을 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나는 친구의 부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속상할 때가 많지요”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요즘엔 우리집에 언제나 예쁜 세살짜리 딸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요.”

국회에는 얼마전 ‘장애아이, WE CAN’이라는 연구 모임이 생겼다. 그리고 그 모임은 한나라당의 얼짱 여의원인 나경원 의원이 주도했고, 그녀의 딸은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아이다. 나 의원 역시 나의 친구 가족처럼 그늘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녀의 그토록 밝고 맑은 미소가 아직도 불행으로 생각하는 가족과 아직도 장애인 정책에 적극적이지 못한 정부당국의 뜻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길 빈다.

/한선교 국회의원(용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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