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세상 사는 맛

인천에 있는 모 대학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얼마 전 그의 연구실로 작은 소포 뭉치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보낸 곳은 멀리 전남의 항구도시였다. 그 도시에는 그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궁금해 하며 뜯어보니 잘 포장된 속에 청자빛깔의 다기 한 세트와 서툰 글씨로 쓴 엽서 한 장이 있었다. “선생님 덕분에 멋진 운전 매너 하나를 배웠습니다.” 전후사정은 이랬다.

출근길이었다고 한다. 정지 신호를 받고 막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차가 흔들렸다. 놀라서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그의 차 뒤에 낡은 아반테 승용차가 하나 서 있었고 파랗게 질린 젊은이가 운전석에서 겨우 내리더니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댔다. 아마 자신이 들이 받은 차가 그랜저였으므로 꽤 수리비가 많이 들 것으로 지레 짐작하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서툰 운전 솜씨에 사고가 난 것을 미안해하는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몹시 난처한 표정이 딱해 보일 정도였다.

그는 ‘젊은 녀석들의 운전 습성이 고약하단 말이야’ 하고 마음 속으로 혀를 차며 뒤로 가서 살펴보니 다행히 차체에는 손상이 없고 범퍼가 약간 주저앉은 정도였다. 달포 전에 뒤로 주차하다가 부딪쳐 약간 손상을 입었는데 이번 충격으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는 순간 강의 중에 있었던 제자와의 토론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부유한 건물주가 영세상인의 얼마 안 되는 권리금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소송으로 발전한 사례인데 영세상인이 지고 말았다.

그는 젊은이에게 “괜찮아요. 마침 범퍼를 새것으로 갈려고 하던 참인데……, 잘 가시오” 하고 차에 올라타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그후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선물을 보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아주 기분이 좋다는 말을 했다.

손해 보고 못 사는 세상이라고 한다. 아니 작은 이익이라도 있으면 물고 늘어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자신이 감수할 정도의 손해라면 흔쾌히 양보해 주는 것이 우리 공동체를 밝게 해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전라도 청년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들 역시 배웠다. 잘 몰라서 손해를 보거나 똑똑지 못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의 맛이 있기에 양보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그는 법률을 전공한 따지기 좋아하는 친구다.

/나채훈.역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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