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도 나름대로 사훈 같은 게 있었나 보다. 개성 상인들 사이의 공익단체였던 송도계의 계훈(契訓)에 ‘콩이 되지 말고, 메주가 되어라’는 말이 있다. 됫박속의 콩을 땅에 부으면 뿔뿔히 흩어져 버리지만, 이 콩을 삶아 짓이겨 메주를 만들어 놓으면 굳게 결속함에 착안, 함께함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부분이다.
또 홍길동전을 지었던 허균의 스승이면서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인 조선시대 이달(李達)은 당시 서족(庶族)으로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는데, 서족 출신의 문사(文士)들이 함께하는 삼분계(三分契)를 만들고 계훈을 정해, 소속 계원들의 이익이나 주장·재능·불행·명예 등 그 모든 것의 십중삼분을 서로 양보하고, 인화를 도모하자는 뜻의 정신적 규정들을 강조했다. 이렇듯 한국적 집단에서 인화는 예로부터 가장 소중히 여겨진 덕목중 하나였다.
필자가 가끔 우리나라 각종 기업과 단체들의 사무실을 찾다보면, 여러 사훈들 중 아직도 가장 으뜸을 차지하는 것 역시 인화단결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인화가 잘 안되기 때문에 혹은 고금을 불문하고 인화의 소중함이 함께 공유되기 때문에, 인화를 사훈으로 채택하는 것이리라.
요즈음 미국내 많은 기업들 사이에서도 동양적 사고의 발상이라 볼수 있는 ‘인화’를 기업방침으로 중요시하는 조짐이 완연하다. ‘인화’의 성격을 띤 사훈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제너럴 모터스의 사훈이 MR(Meaningful-Relation)로 인화를 통한 ‘뜻있는 관계’, 즉 운명공동체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꾸만 정서적으로나 인심적으로 메말라만 가고 있는 우리사회 전반적인 세태들을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정보화의 물결 속에 설익은 구미제국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닥쳐온 바람에 우리 전통사회의 ‘메주’가 ‘날콩’으로 환원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얼마지 않아 심마니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이어지는 푸르른 5월이 된다. 아마추어 심마니들 사이에서는 삼을 보게 되면 엔(N)분의 일(자기들끼리 사용하는 속어)이라고 해서 최초로 다수의 삼을 발견한 사람이 여타 일행 동료들에게 삼을 나눠 주는 나름대로의 불문율이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훈으로 널리 표방되는 인화란 말이 하나의 구호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며 각 가정마다 어릴때부터 꾸준히 가르쳐 나감으로써 이 사회에서도 상생의 정치와 서로돕는 풍토가 무르익는, 그래서 뭔가 비전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비단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김석우.대한적십자사 경기지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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