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열린우리당 창당에 부쳐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한국 정치가 4당 체제로 접어들었다. 국민 정서에 영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겠지만, 우리당이 ‘깨끗한 정치’를 표방한 데는 약간의 무리수가 따르지 않았나 싶다. 썩어 문드러진 정치를 청정케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은 좋으나 그 일이 말이나 구호처럼 실현되기 어려운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민이 깨끗한 정치에 목말라하는 정황은 익히 알고 있으나, 일정 부분 양해사항으로 넘어가야 할 사항이라는 느낌이 든다. 본디 인간은 욕망의 가죽부대이며 정치는 이권의 자갈밭이 아닌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인데 누구인들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정치성향을 옥석을 가리는 잣대로 삼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역사의 전개과정도 그러했지만 오늘 우리는 두 갈래 정치인 그룹의 각축을 보고있다.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못 가진 다수와 행복권을 나누어 가지려는 보편가치의 신봉자(진보, 개혁지향)와 각축의 대상으로 보아 ‘생존경쟁에 승리하지 못하면 자연도태 된다’는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을 지닌 다윈의 진화론의 신봉자(보수논객)를 이름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참칭’의 선에 머물고 국민이 허울만의 나라 주인이 된 이유는 어디 있을까. 정치가 상궤를 달릴 수 있으려면 선진국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출신성분에 따라 이를테면, 재벌이나 고관대작 출신 등 소수 특권은 ‘부자의 훈수꾼’을, 민중 세력은 자기 계층을 위해줄 일꾼을 골라 대통령으로나 국회의원으로 뽑아야 제격이었을 터였다.

네티즌의 반란으로 상황이 좀 달라졌으나, 기대는 늘 무너지곤 했다. 민중 세력 가운데 상당수가 간교한 부자들 훈수꾼의 원격조정에 놀아나 속한 계층에게 별 영양가 없는 부자의 훈수꾼을 ‘동향인’이니 ‘동창생’, 또는 ‘사람이 똑똑하다’ ‘신세를 졌다’는 등 이유로 밀어주는 미욱함을 드러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잘해도 흥, 못해도 흥’ 하며 자녀를 응석받이로 키운 못난 아비와의 닮은꼴이었다고나 할까. 성경의 <좁은 길> 논을 빌 것도 없이, 아무리 이권에 팔리고 국민 배신을 일삼아도 예쁘게 보아주는 들러리꾼들이 있으니 국민을 의식할 리 만무였으리라 함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이에 부자의 훈수꾼인가, 대다수 국민의 친구인가를 가리는 기준의 설정을 필요로 할 듯하다. 햇볕정책에 반기를 드는 반 통일인가 통일지향인가, 외세 의존인가 민족지상주의인가, 재벌규제 완화인가 규제강화 쪽인가, 성장위주인가 사회복지 강화 정책 추구인가를 눈 여겨 보라.

그 가운데 어느 쪽이 부자의 훈수꾼인지를 족집게처럼 집어낼 만큼 유권자의식이 높아지고 똑똑해지는 날이 한국이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날이다.

근자 지역구 출신 민주당 최용규 의원의 개혁지향의 열려진 우리당 입당에 이어 고양 출신 정범구 의원의 민주당 탈당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이해 득실 면의 고려를 떠나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읽은 이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아끼고 싶지 않다.

에스케이 대선자금 수수로 존폐의 지로에 선 한나라당의 돌파구 마련에 지도부가 공조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내 소장파 의원들이 지도부에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한석현.정신개혁시민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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