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서울 도심지 남대문통 데모 군중에서 이런 외침이 백주에 나왔다. 국회의사당이 데모대에 피습당해 개회 중이던 국회의원들이 이 복도 저 복도로 피해 도망 다녔다. 당시 국회의사당은 지금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는 태평로 건물이다.
1960년 자유당(이승만 대통령) 정권의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규탄이 독재정권 타도로 번진 4·19 유혈 민중의거는 이승만의 하야를 가져왔다. 그해 6월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독재에 혼난 것을 경험삼아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헌, 7월12일엔 장면(총리) 정권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당은 민생 등 당면 과제는 뒷전인 채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쟁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장총리는 신파였으며 당시 김영삼은 구파, 김대중은 신파에 속했다.) 정부란 게 이 모양이다 보니 연일 데모 투성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지는 가운데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가 나와도 잡혀가지 않고, 국회의사당을 습격해도 당하기만 할 정도의 무법천지 세상이 돼버렸다. ‘京畿道史’(경기도사)는 ‘제2공화국의 붕괴’ 대목을 ‘치안부재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에 사회는 크게 불안하게 되었으며 연일 항의집회와 시위가 끊일 사이 없어 집회와 시위의 범람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데모 덕에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는 그래선지 10개월만에 역시 데모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 이듬해 1961년(육군소장) 박정희가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데모가 자취를 감추자 ‘차라리 잘됐다’는 것이 당시의 대체적 사회감정이었다.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행하게도 이같은 대중의 긍정적 정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SBS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정치깡패로 한창 득세하고 있는 이 아무개 등이 ‘나는 깡패입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서울 도심지 거리를 조리 돌림당한 끝에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를 거쳐 처형(사형)된 게 그 무렵이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시해당한 이듬해 이른바 유신철권이 철폐되고 나서 ‘서울의 봄’이 한창이었다. 유신독재에서 되찾은 민주주의가 3김씨를 중심으로 만발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데모천국의 사태가 재발되었다. 이 혼돈의 틈새를 타고 세력을 키운 것이 전두환 노태우 (두 육군소장) 중심의 신군부였다.
참으로 기이한 독재와 데모의 악순환이 이 나라 정치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데모 열풍은 도져 지금도 드세다. 물론 옛날 데모와는 다르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염려된다. 위도 원전폐기물처리장, 미군 용산기지 평택 이전 등 국책사업에서 시·군이 길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하는 것마다 반대에 부딪히지 않는 게 없다. 과천 정부청사나 지방자치단체엔 데모가 끊일 날이 드물다. 데모마다 ‘결사반대’를 내건다. 그같은 데모가 과연 죽음을 각오할 만큼의 명분을 지녔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고액 연봉의 노동자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통일운동가란 선동자들, 극우세력 등 이밖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데모할 궁리만 하는 세상이 됐다. 물론 데모의 이유가 다 부당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다 정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문제는 떼 쓰기로 밀어붙여야 뭐가 돼도 된다고 보는 굴절의식에 있다. 원칙이 변칙에 의해 파괴돼 가고 있는 게 두렵다.
세상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데모도 민주주의 한 수단이라면 데모의 방종보다는 책임이 더 큰데도 방종만 있고 책임은 실종됐다. 명색이 집권당이라는 민주당은 신주류·구주류로 나뉘어 싸우는 게 마치 옛 민주당 신·구파의 이전투구를 방불케 한다. 이 정권은 데모문화의 품질과 품격을 재정립해야 할 책임이 있다. 데모의 혼란이 보다 나은 사회문화의 성숙으로 가는 과정일 지라도 부정적 실험 과정은 되도록 빨리 끝내는 것이 국익이다. 이러다간 ‘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데모 군중서) 또 나오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데모대에게 짓밟힐 수도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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