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숲 속에서의 여유

천보산 서쪽 끝자락, 의정부시 녹양동에서 오르는 산을 ‘아고배산’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한양 인근의 산이 주산이 되고자 한양을 향했는데, 아고배산도 한양을 향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고 한다. 아고배산 보다는 먼저 왔지만 역시 늦었던 수락산이 “이놈아 나도 늦었는데, 네놈이 뭘 어쩌겠다는 거야” 하면서 아고배산의 배를 발로 차자, “아이고 배야” 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명 빡빡산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던 탓에 포화로 산이 벌거숭이가 되어,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갈립산(葛立山)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한 산이다. 어쨌든 시민들에게 익숙한 산명(山名)은 빡빡산이다. 지명유래전설이 그 대상물을 공유하고 있는 구성원들 간에 연대감 내지는 공감대 형성에 일조를 한다는 개론적인 이유에서 빡빡산으로 칭하고자 한다.

반세기가 흘러서 인지 이제는 빡빡산이라는 이름이 다소 무색하다 싶을 정도의 숲이 조성되었다. 특히 소나무가 한 여름날의 땡볕 가려줄 만큼의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산을 다녀간 때가 밤나무 꽃향기 흩날리면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됨을 알리던 때였으니, 달포 만에 다시 왔구나 싶다. 이제는 신록(新綠)을 한껏 내뿜는 밤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산 입구로 접어든다. 어디서든지 아무렇게나 볼 수 있는 아카시아, 참나무도 사열을 거든다. 사열이 끝나는 자리에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군용도로요, 다른 한 길은 소나무 숲길이다. 숲길로 접어든다. 싸리 꽃이 보랏빛 향연을 펼친다. 산나리 꽃의 서정적인 화려함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얼마쯤 오르면 약수가 있다. 약수의 시원한 고마움을 뒤로 하면서 올라, 지금은 예비군훈련장인 솔잎 수북하게 깔린 절골 ‘절터’를 지난다. 각시당 터에서 걸음을 멈춘다. 마지막 능선을 따라 봉우리에 오르기 전에 다른 산과는 달리 숨 한번 몰아쉬지 않았기에, 순전히 예의상 한번 쉬는 것이다.

산허리를 굽이쳐 돌면서 오르는 이 빡빡산의 숲길을 좋아한다. 미움을 용서하되 잊지는 않고, 나 자신에게는 엄격함을, 모든 이들에게는 푸근함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 빡빡산의 소나무 숲길을 참 사랑한다.

/백운화.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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